첫 1인 2역 주연 ‘새로운 인생작’ 자리매김 “안나 연기할 땐 혼란…유미 얼굴 만들기 위해 잠 안 자기도”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미묘한 감정들을 많이 느꼈어요. ‘얘가 대체 뭘 잘했다고 내가 얘한테 공감하고, 응원하고 있지?’ 하면서(웃음). 그런데 볼수록 이 여자의 인생이 참 안쓰럽고 가혹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더 유미라는 인물을 연기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게 출연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요, 또 그걸 잘 표현해 낼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죠(웃음).”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드라마 ‘안나’에서 수지는 헤어날 수 없는 삶의 구렁텅이에 지친 이유미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이안나를 연기하며 데뷔 후 첫 1인 2역 주연으로서 이야기를 이끈다. 사소한 거짓말로 시작해 이름과 가족, 학력, 그리고 과거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거짓말로 쌓아 올린 삶을 살아가게 된 유미의 위태로운 심경을 세심하게 연기해 낸 수지의 변신에는 호평만이 쏟아졌다.
10대의 유미부터 30대 후반의 안나까지 한 여자가 겪는 인생의 다층적인 상황과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인물의 복잡다단한 심리 변화 속 섬세하고 밀도 높은 감정 연기를 보여준 이 작품을 두고 벌써 수지의 ‘인생작’이라는 이름표가 붙을 정도다.
“안나를 연기할 땐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유미에겐 공감이 많이 됐는데 안나는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이 컸거든요. 중후반부 연기를 하다가 얘가 이게 진심인지 아니면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구는 건지, 대본을 볼 땐 명확했는데 현장에서 막상 리허설을 하려니 너무 모호한 거예요. ‘얘는 진짜가 뭘까?’ 하면서. 그래서 이런 심리는 어느 쪽에 가까울지 자문을 많이 구했는데 심리 선생님이 ‘지금 수지 씨가 생각하는 감정이 맞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애매모호한 채로 놔두는 게 안나의 진짜 마음일 수 있겠다 싶었고 그렇게 믿고 연기하려 했어요.”
인생작이 될 것임을 미리 짐작했기 때문일까. 대본이 주어졌을 때부터 수지는 이 작품에 욕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유미와 안나를 누구보다 잘 연기하고 싶었고,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책임감을 넘어선 사명감까지 느낀 작품도 ‘안나’가 처음이었다.
“‘건축학개론’ 때는 제가 (연기를) 많이 모르다 보니 감독님께 의지를 많이 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제가 책임감을 많이 느꼈죠(웃음). 늘 모든 작품에 책임감을 느끼지만 제가 많이 욕심을 냈던 작품이기도 하고 제가 해내야 할 게 많다고 느껴져 사명감 같은 게 있었거든요.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해서 그냥 거짓말 하는 사람처럼 연기를 하고 싶진 않았어요. 왜 이 여자가 이런 인생을 살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부담감이나 불안도 있었는데 일단 결정을 하고 나면, 그 다음 일은 다음에 결과로 만들어내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 정도로 욕심이 났던 작품이었어요.”
화려한 삶을 사는 안나로서의 존재감도 그랬지만, 수지의 연기력은 삶에 찌들 대로 찌든 유미의 모습을 연기할 때도 큰 빛을 발했다. 갑의 갑질에 철저히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을의 공허한 눈빛과 초췌한 안색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안나가 되고 싶은 유미의 욕망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수지 역시 이 연기가 시청자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제 초췌한 얼굴들을 더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웃음). 그 얼굴을 만들기 위해 정말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잠도 안 자고 그런 부분을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웃음). 그런 얼굴이 유미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나 상황들을 잘 살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안나’ 안에서의 제가 연기하는 목소리는 원래 제 목소리에 가까운 느낌인 것 같아요. 이번 작품에선 말투랑 톤을 많이 고민했는데 너무 꾸며내는 안나일 땐 조금 부자연스럽게 꾸미는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그거에 신경을 곤두세우려고는 안 했어요. 또 고등학생 시절이나 각 나이 대에 맞는 말투 같은 것도 고민을 많이 해서 연기했는데 감독님이 많이 좋아해주시더라고요(웃음).”
그의 말대로 ‘안나’에서 수지는 10대 시절 유미부터 30대 후반의 안나까지 한 여자의 일생 절반을 홀로 연기해 낸다. 교복을 입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동안인 수지가 자신의 나이보다 열 살은 위인 30대 후반을 맡는다는 점에서 그 ‘갭’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드라마가 공개된 뒤에는 그런 우려는 언제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그의 최대치의 연기력이 뒷받침되면서 최소한의 분장만으로도 충분한 개연성이 갖춰진 것이다.
“30대 후반까지 연기하기엔 제가 너무 어려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감독님과 얘기했던 건 ‘안나는 돈이 많으니까 관리를 엄청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 시절보다 피부도 더 좋을 것이고, 요즘 30대는 20대와 별 차이가 없다’(웃음). 그래서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감정에만 집중하려 했어요. 중요한 건 나이가 들어갈수록 안나가 거짓말에 좀 더 익숙해지면서 뻔뻔해지며 생기는 노련미, 그런 것에 집중을 하려 했죠. 처음 거짓말을 하면서 ‘이게 먹히잖아, 쉽네? 이 사람들 다 바보 아니야?’ 하면서 세상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하며 점점 대범해지고, 그 거짓말에 익숙해지는 변화 말이에요.”
새롭게 그의 ‘인생작’으로 자리 잡은 ‘안나’ 이후 수지는 2023년 또 한 번 OTT 시리즈로 시청자들과 마주할 예정이다. 스크린과 지상파 3사, 케이블, 그리고 OTT까지 차근차근 배우의 무대를 순서대로 밟아 온 그는 올해로 배우 데뷔 11주년을 맞았다. 영화 ‘건축학개론’(2012)으로 ‘국민 첫사랑’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라이징 스타가 그의 이름과 존재만으로 대중들에게 믿음을 주는 ‘타이틀 롤’로서 우뚝 서는 데 11년이 걸린 셈이다. 걸그룹 미쓰에이의 수지에서 배우 배수지로, 그리고 다시 수지로 쉴 틈 없이 달려온 그는 요즘 욕심 대신 책임감을 채우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제가 요즘 목표를 안 정한 지 꽤 됐거든요. 목표를 안 정하는 게 제 목표예요(웃음). 옛날엔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자 하는 마음이 컸는데, 물론 지금은 열심히 안 보낸다는 게 아니고요(웃음). 그냥 열심히 뭔가를 해야겠다는 강박을 좀 덜어내고, 좀 편하고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해요. 그게 목표라면 목표인 것 같아요. 이제까지 너무 힘들더라고요, 뭔가를 꽉 붙잡고 사는 느낌이었거든요. 그걸 내려놓는 것이 제가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