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연기력 논란 직면했던 수지, 20대 끝자락에 ‘안나’ 만나 만루홈런
수지에게 전환점을 만들어준 작품은 쿠팡플레이가 공개한 6부작 드라마 ‘안나’다. 타이틀롤에 단독 주연까지 맡은 수지는 사소한 거짓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인생의 파고를 겪는 주인공 안나 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말랑말랑한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을 벗어던지고 거짓말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 처절한 인물로 변신한 수지를 향해 호평이 이어진다.
#송혜교에서 수지로 바뀐 주인공
배우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는 수지가 처음부터 ‘안나’의 출연 기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안나’의 기획이 시작된 2018년께 제작진이 가장 먼저 주인공으로 점찍은 배우는 바로 송혜교였다. 2019년 6월 ‘안나’에 출연할 계획도 공개했다. 당시 그는 이혼 절차에 돌입하면서 개인적으로 복잡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지만, ‘안나’ 출연에는 의욕을 보였다. 평단의 호평을 받은 영화 ‘싱글라이더’를 연출한 이주영 감독의 신작이란 사실도 송혜교의 선택을 이끌었다.
하지만 당초 영화로 기획됐던 ‘안나’가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그 과정에서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기획이 바뀌자 마냥 기다릴 수 없던 송혜교는 작품 참여를 포기했다. 대신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글로리’와 또 다른 작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차기작으로 택해 촬영에 돌입했다. 송혜교가 떠나고 공석이 된 ‘안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주인공이 다름 아닌 수지였다.
보통 스타급 배우들은 출연작을 결정할 때 누군가 출연 제안을 거절한 사실이 알려진 작품은 꺼리기 마련이다. 불필요하게 비교 대상에 놓이고, 캐스팅 1순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져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지는 달랐다. 송혜교가 거절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익히 알려졌는데도 ‘안나’ 출연을 망설이지 않았다. “읽는 동안 빠져든 대본의 재미”와 “배우로서 한번쯤 도전해볼 법한 캐릭터”라는 판단에 곧장 제안을 수락했다.
#연기력 논란 딛고 배우로 다시 전성기
아이돌 그룹 미쓰에이 출신의 수지는 2011년 KBS 2TV 드라마 ‘드림하이’로 연기를 시작했다. 아이돌 스타라는 후광에 힘입어 연기를 시작한 수지가 일약 주연급 배우로 떠오른 계기는 2012년 영화 ‘건축학개론’의 흥행이다. 그로부터 10년간 따라붙은 ‘국민 첫사랑’이란 수식어도 그때 생겼다.
인기가 무색할 정도로 연기력은 늘지 않았다. ‘건축학개론’ 이후 드라마 주연을 도맡았지만 매번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2016년 김우빈과 주연한 KBS 2TV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 당시에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연인과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그리면서도 어색한 연기로 일관해 ‘연기력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후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7년 이종석과 호흡을 맞춘 SBS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 2019년 이승기와 주연한 SBS ‘배가본드’에서도 팬덤의 지지와는 별개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수지는 혹독한 평가에도 연기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영화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시도했다. 2015년 배우 류승룡과 판소리 사극 ‘도리화가’를 소화했고, 2019년에는 하정우와 부부로 호흡을 맞춰 재난 블록버스터 ‘백두산’에 출연하기도 했다. 판소리에 도전하고, 임신한 신혼부부 역할을 맡는 등 다른 모습을 보이려는 시도도 관객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지난 10년이 와신상담의 과정이었을까. 스타로서 받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별개로 유독 연기 활동에서는 냉정한 평가에 직면해야 했던 수지가 20대의 끝자락, 서른 살을 앞두고 ‘안나’를 만나 만루홈런을 치고 있다. ‘수지의 인생작’, ‘배우 전성기’라는 후한 평가도 뒤따른다. 연기력 논란 대신 쏟아지는 호평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수지조차 “좋은 기사들이 많아 신기하다”며 놀라고 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싶은 욕망”
‘안나’는 정한이 작가의 소설 ‘친밀한 이방인’이 원작이다. 이를 토대로 이주영 감독이 각색해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 여자의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사실 남의 인생을 훔쳐 거짓 삶을 사는 인물들을 다룬 이른바 ‘리플리 증후군’ 소재의 작품은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안나’ 역시 작품이 공개되기 전까지 크게 관심을 끌지 않았지만 오히려 낮은 기대감이 작품 공개 뒤 폭발적인 호평을 끌어내는 기폭제가 됐다.
수지는 배우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연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려는 욕심이었다. ‘안나’의 대본을 확인하고선 확신이 섰다. 앞서 주인공으로 거론된 다른 배우가 있었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았다. 수지는 “누가 봐도 욕심을 낼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에 ‘뺏기지 말아야지’ ‘내가 해야지’라는 마음이 앞섰다”라고 말했다.
‘안나’는 수지의 원맨쇼에 가까운 드라마다. 10대부터 30대까지 한 인물의 중요한 인생을 표현한다. 그가 맡은 유미는 원하는 것을 갖고야 마는 똑 부러지는 성격. 고3 시절 학교의 젊은 교사와 교제한 사실이 발각돼 서울로 강제 전학을 당하면서 시련이 시작된다. 번번이 대학 입시에 낙방하던 그는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주려 대학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로 결국 안나라는 사람의 인생까지 훔쳐 사는 처지가 된다.
수지는 10대의 유미가 남의 인생을 훔쳐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얻고 결혼까지 하는 30대의 안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매회 위태롭게 그려낸다. 준비도 철저히 했다. 촬영 전 심리전문가를 만나 도움을 받았고, 나이와 상황의 변화에 맞춰 무려 150여 벌의 의상도 갈아입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노력 덕분일까. 분명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극 중 수지는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내고 급기야 응원까지 하게 만들고 있다. 안쓰러우면서도 절박한 모습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덕분이다. “새로움”을 향한 수지의 “욕망”이 마침내 결실을 맺고 있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