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 시절 안중근 의거 포함 5명 피살…2차 대전 이후엔 아베가 처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초대 총리 출신으로 4차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하다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 근대화를 이끈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는 상황에서 총탄 3발을 맞고 즉사했다. 안중근 의사 의거로 일본 근대화 거목이 쓰러진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1921년 11월 4일엔 총리에 재직 중이던 하라 다카시가 도쿄 역에서 한 극우 범죄 단체 소속 청년에게 칼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간인이 일왕 일가 혼인 문제에 관여했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사건이었다.
1932년 5월 15일엔 일본 제29대 총리인 이누카이 쓰요시가 일본 해군장교로부터 암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1931년 12월 취임한 그는 한 달 만에 위기를 맞았다.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처단하려는 시도가 미수에 그친 의거가 있었다. 이 사건에 책임을 느낀 이누카이는 총리 직 사퇴 의사를 밝히지만, 일왕이 이를 반려했다.
결과적으로 일왕이 반려한 사표는 이누카이의 명을 재촉하는 선택이 됐다. 당시 일본 내 온건파로 분류됐던 이누카이는 강경파로 전쟁을 원하는 해군 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이누카이 암살 이후 일본은 군국주의 노선을 본격화했다. 이누카이 암살 당시 휴가 차 일본을 방문한 세계적인 유명 희극인 찰리 채플린도 암살 대상이었다는 일화 또한 잘 알려져 있다.
이누카이 암살 사건은 일본 해군장교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2022년 7월 8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를 암살한 이 역시 해군 자위대원 출신이라 두 사건 사이 ‘평행이론’이 주목받고 있다.
이누카이 암살로 총리 권한대행 직을 수행한 다카하시 고레키요 또한 비극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카하시는 20세기 초·중반 일본 경제 정책 사령탑이라고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다카하시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6월까지 7개월간 총리 직을 수행했고, 1932년 5월 15일부터 26일까지 12일 동안 총리 권한대행이 됐다.
총리 권한대행 직을 마친 지 4년 뒤인 1936년 2월 26일 다카하시는 자택으로 들이닥친 육군장교에게 암살당했다. 다카하시는 육군장교가 무차별적으로 휘두른 군도에 치명상을 입어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누카이 후임 총리였던 사이토 마코토 역시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이토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1920년대 조선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문화통치’를 내세운 인물이다. 3·1운동 이후 교묘한 방식의 식민지배 방식을 도입했다. 1930년대 민족말살정책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식민사관 연구 기반을 닦은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이토는 1931년 조선총독 자리에서 물러나 본토로 돌아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리는 총리였다. 이누카이 암살 사건 이후 군부 폭주를 우려한 인사였다. 1934년까지 총리 직을 수행한 사이토는 1936년 2월 26일 암살당했다. 앞서 언급한 다카하시와 같은 날 같은 세력에게 암살을 당했다. 사이토를 암살한 이 역시 육군장교였다. 그는 총탄을 47발이나 맞으며 사망해 가장 잔혹하게 암살당한 총리급 인사로 꼽힌다.
총리가 피살된 것과 별개인 사례도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 전범 재판에 회부된 도조 히데키와 고노에 후미마로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1945년 12월 15일 전범 재판 출두 직전 자신의 자택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해 사망했다. ‘진주만 공습’을 주도해 세계적인 공분을 샀던 도조 히데키는 고노에가 사망한 지 8일 뒤인 1945년 12월 23일 A급 전범으로 분류돼 사형당했다.
일본이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시대에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이다. 독립운동에 따른 피살이 1건, 일본인에 의한 암살이 4건이다. 전범으로 분류된 이들은 각각 극단적 선택과 사형으로 비극적 말로를 맞았다.
이런 선례들이 존재하지만,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피살 사건은 일본 사회 내부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패전 이후 처음으로 총리급 인사에 대한 피습 사건이 불거진 까닭이다. 일본 현지에선 경호 인력들의 늑장 대응이 부른 ‘경호 참사’라는 비판도 잇따르고 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