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제보 사주 의혹과 국정원 X파일로 미운털 박혔나…안보 놓고 신구 권력 정면충돌 예고
7월 6일 오후 국정원은 입장문을 배포했다. 전직 수장 두 명을 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국정원은 “자체 조사 결과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과 관련해 첩보 관련 보고서를 무단 삭제한 혐의 등으로 박지원 전 원장을 고발했다”고 했다. 박 전 원장은 국가정보원법 위반, 공용전자기록손상죄 등 혐의로 고발당했다.
서훈 전 국정원장도 ‘전 직장’으로부터 고발되는 처지에 놓였다. 2019년 11월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에 대한 합동조사를 강제 조기 종료 시킨 혐의다.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은 북한 선원 2명이 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하고 탈북해 귀순 의사를 밝혔지만 우리 정부가 이들을 판문점을 통해 북송한 사건이다.
윤석열 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을 공론화했다. 2년 전 피살 공무원 이대준 씨에게 월북 의도가 있었다고 발표했던 국방부와 해경은 정권이 교체된 뒤 이 사건 관련 입장을 번복했다. 6월 16일 국방부와 해경은 “피살 공무원 이 씨가 월북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브리핑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이후 문재인 정부를 향해 꺼낸 카드는 탈원전도 대장동도 아니었다. 바로 안보였다.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오른 것 역시 강력한 안보 드라이브를 첫 단추로 삼아 문재인 정부 시절 각종 비위 의혹을 규명하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 진상규명 작업으로 시작된 안보 드라이브는 전직 국정원장 고발전으로까지 번졌다.
국정원이 대통령 직속 기관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정치권 일각에선 정국을 강타한 전직 국정원장 고발전 이면에 윤석열 대통령 의중이 반영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6월 중순 만났던 한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이 대중적으로 공론화됐는데, 앞으로는 탈북민 강제 북송 사건을 비롯해 문재인 정부에서 발생한 각종 안보 관련 사건들이 거론될 것”이라면서 “이런 사건들의 진상을 규명해나가는 과정에서 정치권이 상당히 시끄러울 것”이라고 점쳤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이 진상규명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각종 나비효과가 나타났다. 정치 9단 박지원 전 원장과 문재인 정부 안보 인사 핵심인 서훈 전 국정원장에게 진상규명 파편이 날아 들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논란이 된 안보 사건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를 핀 포인트로 집어내는 과정이 투트랙으로 이뤄지고 있다”면서 “그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목표를 향해 밀어붙였던 ‘검사 윤석열’ 방식이 녹아들어 있는 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을 수사하며 스타덤에 올랐던 윤석열 대통령 입장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을 바탕으로 정국 주도권을 임기 초반부터 확실하게 쥐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본다”고 했다.
전직 국정원장 고발전과 관련해 7월 7일 대통령실 관계자는 브리핑을 통해 “고발 사실을 국정원 보도자료를 보고 알았다”면서 “고발 관련 입장이 따로 있지 않다”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가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과 탈북민 북송사건을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대통령실 관계자는 설명을 이어갔다.
“공무원 피격을 두고 국가가 ‘자진 월북’ 프레임을 씌우려 했다든가 북한 입장을 먼저 고려해 귀순 탈북 어민 인권을 침해하는 등 반인권·반인륜적 범죄가 있었다면, 중대한 국가범죄라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국정원 고발 이후 검찰 수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 관련 첩보 보고서를 삭제했다는 혐의로 국정원으로부터 고발당한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국정원이 나를 고발한 것은 정치공세”라고 했다. 박 전 원장은 7월 7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내가 (첩보를) 삭제하더라도 (삭제 기록이) 국정원 메인 서버에 남는다”면서 “왜 그런 바보짓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박 전 원장은 “개혁된 국정원에서 우리 직원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서 “과거 직원들이 국정원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들이 과거에 하던 일을 지금도 하는 것으로 착각해 바보짓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도 국정원이 직접 전직 국정원장을 고발한 것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더불어민주당 서해 공무원 사망사건 TF(태스크포스) 위원장 김병주 의원은 7월 7일 국방부를 방문해 “국정원에서 군사정보통합체계 관련 고발이 이뤄지고 있는데 그것은 국정원에서 삭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국정원은 정보기관인데 이를 형사 사건으로 법정으로 갖고 오는 것은 안보에 구멍을 내는 것”이라면서 “정보기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꾸 언론에 공개한다든지, 고소·고발한다든지 하는 것 자체가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과 탈북민 강제 북송 사건 당시 집권했던 문재인 정부를 향한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7월 7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은 북한 심기를 살피면서 국가 존엄과 책무까지 갖다 바친 조공 외교였고, 나아가 굴종적 태도로 사실까지 조작하는 ‘종북공정’까지 했다”고 했다. 두 사건에 대한 보다 세밀한 진상규명의 당위성을 강조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검찰은 국정원이 두 전직 원장을 고발한 지 하루 만에 수사에 돌입했다. 7월 7일 서울중앙지검은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첩보 관련 보고서 삭제 사건을 공공수사1부에, 서훈 전 국정원장을 둘러싼 탈북어민 합동조사 조기 종료 의혹 사건을 공공수사3부에 각각 배당했다. 검찰은 일련의 사건들과 관련해 특별수사팀 구성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야권 관계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전 정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보를 쥐고 있었던 두 전직 국정원장을 상대로 안보를 명분으로 싸움을 건 것”이라면서 “그 첫 상대가 정치 9단이라고도 불리는 박지원 전 원장인 점은 주목할 만하다”라고 했다. 그는 “박 전 원장은 대선 전 윤 대통령을 둘러싼 고발사주 의혹과 관련해 ‘제보 사주 의혹’에 휘말렸고, 최근엔 국정원 X파일을 거론하며 정부에 미운털이 박힌 것 아니냐”면서 “임기 초 강력한 안보 드라이브 유력 타깃이 박 전 원장이 된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특유의 뚝심을 바탕으로 안보 이슈 진상규명에 승부를 건 것으로 보인다”면서 “전직 국정원장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지는 새로운 진실들이 얼마만큼의 무게감을 가지느냐에 따라 향후 윤 대통령 국정 동력의 무게감이 결정될 수 있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