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 구매가 1000만 원 늘어 경쟁력 약화 우려…WTO 제소 도움 안돼, 업계 “정부가 적극 나서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1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했다. 인플레이션 완화를 위한 법안으로 기후변화 대응, 의료비 지원, 법인세 인상 등을 골자로 한다. 전기차 대중화를 위해 보조금을 확대한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문제는 2023년부터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기차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추출·제조된 광물이 배터리에 일정 비율 이하로만 탑재돼야 한다.
현재 미국 현지에서 아이오닉5와 EV6 등 현대차그룹의 전기차를 구매하는 고객은 7500달러(1000만 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 따라 내년부터 현대차그룹의 전기차는 미국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이 아닌 국내에서 전기차 전량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소비자 입장에서 아이오닉5와 EV6의 구매가가 실질적으로 1000만 원가량 늘어나는 셈이다.
현대차는 2025년까지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지만 법안 통과에 따라 조기 착공을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착공 시점을 앞당기더라도 최소 1년 6개월 이상은 보조금 혜택에서 제외된다. 이재일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에 따라 현대차그룹의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이 축소될 수 있다”며 “조지아 전기차 공장의 가동이 시작돼야만 본격적인 전기차 물량 공급이 가능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업체들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라 전기차 배터리 자재인 리튬, 코발트, 니켈 등을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를 통해 일정 비율 이상을 공급받아야 전기차 보조금 절반을 받는다. 이 비율은 2023년 40%에서 2027년 80%까지 늘어날 예정이다. 나머지 절반의 보조금은 양극재, 음극재, 전해액, 분리막 등 배터리 주요 부품의 북미 생산 비율이 50% 이상이면 받을 수 있다. 미국은 해당 비율도 2028년 100%로 늘릴 계획이다.
즉, 배터리 업체가 미국이 제시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해당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기차도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배터리 업체와 거래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중국 의존도를 최소화해야만 북미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배터리 업체도 원자재 수입 다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홍지상 한국무역협회 연구위원은 보고서를 통해 “전기차 수출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올해 상반기 중국으로부터의 수산화리튬 수입이 404% 증가했다”며 “대 중국 의존도가 83.2%로 수입선 다변화 및 수입대체가 절실하다”고 전했다.
현대차와 배터리 업체들은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지만 법안 통과 직전까지 미국 정치권에 상당한 물밑작업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CNBC는 지난 8월 11일 “한국 자동차 업계는 한미 FTA를 언급하며 미국 하원에 한국산 전기차와 배터리에 세제 혜택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블룸버그’는 지난 8월 12일 “어떤 한국 업체는 법안의 구체화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며 “현재 법안은 여전히 애매한 부분이 있고, 미국 자동차 업체의 로비가 있으면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고 전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를 강행한 후에는 한국 정부에 의존하는 분위기다.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와 현대차,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4개 회사가 비공개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들 업체들은 미국 현지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힘써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도 산업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미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지난 8월 22일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법이 나오자마자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에게 WTO 규정 위반, 한미 FTA 규정 위반 가능성과 우려를 전달했다”며 “WTO 제소 여부도 아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미국 측에 여러 채널을 통해 우려를 전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회에서는 여야를 초월해 미국을 비판하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미국은 글로벌 공급망 협력을 위한 동맹국을 확보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경제협력체를 추진하고 있는데 한국을 (보조금 혜택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인도-태평양 경제협력체의 비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무엇보다 미국의 세제(보조금) 차별 조치는 한미 양국의 경제안보 동맹 강화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전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미국으로부터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셈”이라며 “외교부가 뒤늦게 의견서를 보낸다고 하는데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이 이제 와서 정책을 수정하겠는가”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바람과 달리 미국이 한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관측된다. 네드 프라이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8월 22일 한국 기업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질문에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뿐 아니라 세계무대에서의 우리의 위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라고 답했다.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 설득에 실패하면 이창양 장관의 발언처럼 WTO 제소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WTO 제소가 현대차에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을 전망이다. 통상적으로 재판에 4~5년이 소요되는데 이때는 이미 현대차 조지아 전기차 공장이 완공될 시점이다.
자동차·배터리 업계에서는 외교를 통한 문제 해결을 촉구하지만 뾰족한 수는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치권에서는 말로만 떠들지 실질적인 대책은 하나도 내놓지 못하고 본인들의 정치적인 이득만 챙기는 것 같다”라며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는 상황에서 개별 기업이 입장을 내기 어려운 상황인 점을 고려해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