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kg 배낭 짊어지고 와 산중 비바크…미끄러운 암벽 오르며 동지애도 싹터
#20kg 배낭 매고, 비바크
큰 배낭 안에 1박 2일 살림을 꾸린다. 침낭, 매트, 등반장비, 1박 2일 먹을 음식, 물 4리터, 거기에 60~70m 로프 1동까지 넣어야 한다. 로프만 해도 무게가 4kg이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겨울용 침낭과 두꺼운 방한복까지 챙긴 뒤 배낭 무게를 재보니 20kg이나 된다. 몸무게가 50kg이니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머리 위로 올라오는 커다란 배낭을 어깨에 들쳐 멘 모습은 흡사 자기보다 큰 소라껍데기를 이고 다니는 ‘소라게’ 같다.
15kg 배낭 메고 첫 배낭여행에 나섰던 20년 전 그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는 침낭도 장비도 음식도 로프도 배낭 속에 없었는데 뭘 그렇게 가득 채우고 다녔던 걸까. 지금 다시 여행 배낭을 싸라고 하면 5kg으로 쌀 수 있을 것 같다.
난생처음 20kg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선다. 북한산 입구인 우이동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질문이 배낭에 꽂힌다. 북한산 입구에서 너나없이 같은 소라게 배낭을 멘 동료들을 만나니 그제야 좀 마음이 놓이지만 인수봉야영장까지 30~40분 동안의 산길은 버스가 아닌 두 다리가 직접 배낭을 실어 날라야 한다.
등산스틱을 지팡이 삼아 엉금엉금 북한산을 오른다. 속도는 나지 않고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무릎은 불안하다. 히말라야 ‘셰르파’가 된 듯한 기분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며 모든 짐을 셰르파에게 맡기고 물과 과자만 잔뜩 넣은 작은 배낭만 메고 다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 갑자기 10년 전 신세 졌던 얼굴도 모르는 셰르파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진다. 역지사지는 생각만으론 안 된다. 닥쳐봐야 깨닫는다.
그래도 끝은 있다. 도착한 인수봉야영장은 야영장이라고 하기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산속 작은 쉼터였지만 배낭을 내려놓고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람은 없다. 북한산에서의 야영은 특별하다. 국립공원 가운데 유일하게 야영이 허락된 곳이다.
그렇게 인수봉야영장의 밤이 시작된다. 어깨로 지고 온 물과 쌀로 밥을 짓고 소소하게 싸온 반찬과 고기를 고단한 몸에 넣어주니 그제야 고개를 들어 산 속 야영의 낭만을 느낀다. 선선한 바람과 상쾌한 공기가 온 몸의 세포를 자극하고 머리가 ‘쨍’ 하고 깨인다. 흙바닥을 고르고 얇은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 매트를 깔아 한기를 차단시키고 바로 침낭을 깔고 그 속으로 쏙 들어가면, 하늘 위엔 달이 둥 떠 있고 나무들이 지붕과 벽을 대신해 아늑한 울타리를 쳐준다. 야영의 맛은 불편해도 꿀맛이다.
#인수봉 우중등반
날이 궂다는 일기예보에 아침부터 긴장이다. 다행히 야영 중 비는 안 왔지만 오전 중에 비 소식이 있다. ‘비가 와도 암벽에 오르나’를 고민해볼 새도 없이 강사들은 “비가 와도 밥은 먹는다”며 인수봉으로 향한다.
조금씩 순서대로 인수봉 ‘의대길’의 아랫자락을 오르고 있는데 흐리기만 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린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 차례가 오자 아주 대놓고 퍼붓는다. 비 오는 암벽을 오르려니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느낌이다. 강물을 거슬러 오는 연어처럼, 인수봉 여기저기엔 ‘물바위’를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로프에 매달려 있다.
물기 어린 암벽은 평소보다 더 미끄럽다. 암벽을 타고 흐르던 빗물이 무서움에 암벽에 납작 붙어있던 몸속으로 흘러들어 온몸을 타고 빗물이 흐른다. 속옷부터 양말까지 모두 통과해 다시 흐르는 빗물. 비와의 물아일체다. 어느새 온몸이 덜덜 떨린다. 아직 가을의 초입이지만 젖은 몸은 점점 차가워지고 한기가 느껴진다. 추위에 굳어진 손가락은 더 뻣뻣해지고 근육도 잔뜩 긴장한다. 5~6명으로 구성된 한 조는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해서 마음대로 오르고 내릴 수 없으니 어찌해도 이 순간을 견뎌야 한다.
환경이 좋지 않을 땐 선등자와 후등자 간 의사소통이 더 중요하다. 의사들만 생명을 다루는 게 아니다. 등반가들의 로프에서도 생명이 이어진다.
“아악!”
교육생의 비명 소리에는 공포와 함께 앞서 간 다른 등반자에게 로프를 더 당겨 달라는 뜻이 숨어있다. 등반자가 손으로 로프를 직접 잡고 올라갈 수는 없지만 위에서는 후등자의 몸에 매달린 줄을 어느 정도 당겨줄 수 있다. 힘들 때마다 꼼수 같은 비명이 새어 나온다. 얼굴에 흐르는 빗물과 함께 눈물도 ‘찔끔’ 나올까 말까. 흘러내리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기상이 안 좋으니 더 불안하고 무섭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다. 옆에 동료가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힘이 된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는 채로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은 서로의 상처를 안타까워하면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벽을 오른다. 어쩐지 철 지난 단어 같기만 한 ‘동지애’가 싹트는 중이다.
비가 계속 쏟아지자 철수를 결정했다. ‘오아시스’라 불리는 테라스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낸 것 같이 느껴졌지만 사실 그곳은 인수봉 등반의 초입 부분이라고 했다. 인수봉 등반이 등산학교의 꽃이라고는 하지만 등산의 목적은 정상이 아니라 다치지 않고 끝까지 안전하게 하산하는 것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비 오는 와중에도 정상까지 등반을 강행한 뒤 성취감을 가득 안고 하산한 조도 있었지만, 사실 마음속으론 완등은 별로 부럽지도 않고 그저 이대로 어려운 등반을 건너뛰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더 컸다. 이렇게 또 한 주를 겨우 버텨냈다. 그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암벽등반 체험기④]로 이어집니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