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감정’ 버릴 명분을 줘야지
▲ 전경련의 잇단 구애에도 구본무 LG그룹 회장(사진)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아 이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오가고 있다. | ||
지난 11월11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 직후 강신호 전경련 회장이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자신 있게 흘린 말이다. 모처럼 12개 기업 인사들이 모여 활기를 찾은 이날 회장단 회의 이후 강신호 회장은 구 회장의 전경련 참석을 공개적으로 요청한 것.
이날 외에도 강 회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구 회장을 반드시 연말 회의에 참석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왔다. 전경련 안팎에선 ‘(전경련이) LG 계열사의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려온다. ‘구본무 모시기’를 위한 전경련의 ‘눈물겨운’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전경련이 이토록 구 회장 참석을 원하는 이유는 전경련 위상 강화를 위해서다. 최근 들어 전경련은 삼성 현대차 LG 등 재계 빅3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받아왔다. 올 초 전경련 회장단은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이 회장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6월엔 현대차 정몽구 회장이 오랜만에 전경련을 찾아 분위기가 달아오를 뻔했다. 정 회장이 현대그룹 분리 이후 경영정상화 등의 이유로 지난 3년간 전경련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참석은 현대차의 미국 현지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재계 인사들에게 만찬을 베풀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지난 11월10일 다시 전경련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초청 만찬을 주관했던 정 회장은 정작 이튿날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구본무 회장의 경우는 더 심하다. 지난 99년 반도체 빅딜 이후 6년간 구 회장은 전경련을 찾지 않았다. 99년 당시 현대에 반도체 사업을 내준 과정에서 전경련이 뒷짐 지고 있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이 진하게 남은 것이다. 빅딜 이후 업체선정에 대한 뒷말이 불거질 때마다 구 회장의 전경련에 대한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는 후문이다.
정몽구 회장이 주관한 11월10일 전경련 회장단 만찬에 구 회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강유식 LG 부회장이 대신 참석했다. 이건희 회장이 부재중인 삼성이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을 내보낸 것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올해 삼성그룹을 둘러싼 안기부 도청 사건과 편법상속 논란, 그리고 두산그룹의 경영권 다툼이 초래한 검찰수사과정에서 전경련은 숨죽이고 지켜보기만 했다. 재계 전반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 시민단체 등의 집중포화에도 큰 목소리 한번 낼 수 없었다. 기업들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였던 탓도 있지만 재계 중심인 빅3가 없는 전경련은 힘을 받을 수 없었던 셈이다.
▲ 지난 6월16일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 참석한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강신호 전경련 회장, 이해찬 총리,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부터). | ||
전경련이 삼성·현대차의 총수보다 LG그룹 총수의 참석에 더 큰 집착을 보이는 가장 큰 이유로 재계인사들은 빅3의 경영승계과정을 꼽는다. 삼성은 이미 이건희 회장 외아들인 이재용 상무의 그룹 지배에 필요한 지분 승계를 마친 상태다. 현대차는 정몽구 회장 외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고속 승진과 더불어 경영권 이양과정에 가속이 붙었다는 평을 듣는다.
반면 LG 구 회장은 대를 잇기 위해 지난해 말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아들 광모씨를 입양했지만 아직 20대이며 학업을 마치지 않은 상태라 구 회장의 ‘롱런’이 불가피하다. 삼성·현대차에 비해 LG는 아직도 현직 총수의 시대가 많이 남은 편이다. 이는 구 회장이 전경련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 경우 전경련을 대표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재계의 큰 어른 역할을 해줄 것이란 기대감으로 연결된다.
일각에선 전경련이 구 회장의 삼성·현대차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자극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신축중인 구 회장 서울 한남동 새집이 삼성 이재용 상무 자택 마당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것을 두고 재계 일각에선 ‘삼성을 향한 LG의 자존심이 반영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현대차에게 재계 2위 자리를 내준 점 역시 구 회장으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해줬다는 평이다.
그러나 전경련을 바라보는 구 회장의 시선에서 아직까진 냉기가 느껴진다. 지난 11월10일 회장단 회의 이후 조건호 전경련 부회장은 “최근 기업인들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고 있어 투자를 통해 이를 타개하기로 했다”며 “전경련이 주관하는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SUMMIT) 2005’에 많은 기업인이 참석하여 한국경제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LG는 전경련이 주관한 이 서밋에 단 한명의 CEO도 파견하지 않았다.
전경련은 12월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올해 마지막 월례 회장단 회의 겸 송년모임을 갖는데 구 회장은 이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외적인 불참 사유는 ‘회사업무와 개인일정’이지만 전경련에 대한 구 회장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전경련의 애를 태우는 구 회장의 속내가 따로 있을 것이란 평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계속되는 ‘러브콜’을 구 회장이 외면할 경우 전경련이 구 회장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제시할 당근의 크기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흘러나오는 ‘LG 계열사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 같은 건보다 더 큰 선물을 전경련이 준비하게끔 구 회장이 뜸을 들이고 있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