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남자였더라면…”
▲ 이인희 고문 회고록(오른쪽)에 삽입된 사진들. 고 이병철 회장의 표정이 정답다. | ||
지난 12월20일 삼성가의 가장 큰어른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희수연을 맞아 자신의 생애와 가족, 경영에 대한 일화들을 모은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책에는 삼성가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의 인간적인 면모와 가족들과의 일화 등 삼성가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이 담겨있다. 삼성가뿐만 아니라 재계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이 고문의 회고록 속으로 들어가본다.
고 이병철 회장은 저녁이면 자녀들을 불러모아놓고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느냐?”, “착하게 살아라”, “하고자 하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라”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고 이 고문은 회고하고 있다. 자녀 교육에 신경을 썼던 이 회장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어린 소녀였던 이인희에게도 식민지 시대와 전쟁의 아픔이 어렴풋이 남아있기도 했다. 삼성상회와 양조장을 지배인에게 맡기고 가족들이 고향으로 피신해야 했고, 창씨개명을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고문도 태평양 전쟁 당시 모 심기와 과수원의 열매 따기, 군복과 군화 깁기에 동원되기도 하고 배낭 속에 3kg짜리 돌을 넣고 행군하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은 부산으로 피신한 뒤 다시 삼성물산을 설립해 전쟁의 와중에서도 사업가로서의 열정을 꺾지 않았다.
첫딸이라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이 고문은 어린 시절 가정 교사의 지도도 받았고 부모님이 오르간도 사주어 건반을 두드리며 음악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공부를 잘했던 이 고문은 당시 명문이었던 경북여고에 진학해 국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이후 이화여대 가정과에 진학했으나 3학년 때 결혼한 사실이 알려져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이 고문에 대해 이병철 회장의 사랑은 각별했다고 한다. “네가 남자였더라면.” 이 회장이 이 고문을 두고 한 말이다.
특유의 꼼꼼하고 당찬 성격 때문인지 이 회장은 이 고문을 일찍부터 경영자 수업을 시켰다. 일선 생산 현장을 찾거나 국내외 주요 인사들과 회동할 때, 골프를 칠 때도 이 고문을 항상 불러 자리를 함께 했다. 부부동반 자리에 부인 대신 딸을 데리고 나오는 사람은 이 회장이 유일할 정도로 큰딸을 챙겼다. 이 회장은 일본에 갈 때마다 ‘여사장학’이라는 책을 몇 권씩 사다주며 공부하도록 격려하기도 했다.
▲ 라운딩 모습. | ||
이 고문이 경영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9년 1월 호텔신라의 상임이사로 취임한 것이 처음. 대학에서 가정학을 전공해 음식과 서비스, 인테리어 등 섬세한 여성적 터치가 필요한 호텔 일이 잘 맞았다고 이 고문은 전하고 있다. 이 고문은 경영진이 채울 수 없는 비품, 서비스, 음식, 기물, 직원 유니폼, 객실, 식당 구석구석을 직접 챙겼다.
한식당의 음식맛이 나지 않자 집에서 직접 장을 담가 나르는가 하면 임직원들을 집으로 초청해 음식 맛의 중요성을 알리기도 했다. 지금도 이 고문은 오크밸리의 음식들은 직접 여러번 시식해 메뉴를 바꾼다.
이 고문이 한솔그룹의 주력인 제지업을 맡게 된 계기는 지난 82년 이 회장이 일본에서 골프를 치며 이 고문에게 “네가 전주제지를 운영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이듬해 이 고문은 전주제지 고문으로 취임했다.
평소 여장부답게 일처리를 하는 이 고문이지만 가족들과 지인들에게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특히 경영 활동에 나서기 전에는 이름난 부잣집 자식답지 않게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사람 사귀는 데 가림이 없었다. 회고록에서 이시형 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 원장은 1975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에서 이 고문을 처음 본 일화를 소개했다.
“점심을 끝내고 뒤뜰에 나가니 김장이 한창이었는데, 옆의 동료가 한 사람을 가리켜 우리병원 사모님이라는 거다. 사모님? 아니 사모님이라면 이름만으로도 깜짝 놀랄 회장님의 맏따님이 아닌가?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그런 분이 아주머니들 틈에 섞여 김장을 담근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이 고문이 열네살 차이나는 언니라 어렵게 대했지만, 미국에서 출산할 때 어머니를 대신해 이 고문이 건너와 돌봐줘 큰 따뜻함을 느꼈다고 전하고 있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