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수한 실적 올린 김정훈 갑작스러운 사임에 눈길…현대차그룹 오너 정의선이 ‘최대 주주’
지난 11월 30일 이규복 현대차 프로세스혁신사업부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현대글로비스 대표이사로 내정했다. 2018년부터 현대글로비스를 이끌었던 김정훈 대표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재계에서는 이번 인사에 대해 다소 이례적이란 반응이 나온다. 김정훈 대표의 임기는 2024년 3월까지다. 1년 이상 임기가 남은 대표를 해임하고, 새로운 대표이사를 선임했으니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김정훈 대표 체제 아래서 현대글로비스의 실적은 대체적으로 견조했다. 취임 직전 해인 2017년 연결기준 7270억 원이던 영업이익은 2021년 1조 1262억 원까지 4년 만에 54.9% 상승했다. 자산 규모는 2017년 8조 1856억 원에서 지난해 12조 1709억 원까지 48.6% 확대됐다.
올해 실적도 긍정적이다. 올 3분기까지 연결기준 누적 영업이익은 1조 3528억 원으로 이미 전년 영업이익을 뛰어넘으며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전년 대비 기준으로는 68.8% 상승한 수준이다. 김정훈 대표가 남은 임기를 채우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주가 추이를 보면 김정훈 대표의 경영 성과가 빛바랜 모습이다. 현대글로비스의 역사적인 고점은 2014년 9월 25일 기록한 33만 7000원이다. 지난 7일 종가가 16만 900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 주가는 고점 대비 반토막(-49.8%) 수준이다.
주주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이사에게 충분히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이다. 특히 최대주주가 현대차그룹의 오너인 정의선 회장이다. 정의선 회장은 지난 9월 말 기준 현대글로비스 지분 20%를 갖고 있다. 이번 대표이사 인사에 정의선 회장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차그룹이 정의선 회장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개편하기 위해 기업 가치를 끌어올려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2018년 현대글로비스는 지배구조 상단에 놓일 것으로 예상되는 현대모비스와 분할·합병 후 계열사 간 지분 거래를 통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려 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글로비스의 지분 가치가 높아지면 정의선 회장이 가져갈 수 있는 현대모비스의 지분이 많아진다.
하지만 당시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반대하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현대글로비스와 분할·합병하는 현대모비스의 주주가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이 같은 지적을 피하려면 현대글로비스의 주가 수준이 더 높아야 했다.
현대글로비스와 현대모비스 간 합병 시나리오는 여전히 유효하다. 지난 8월 현대모비스는 사업회사를 2개 자회사(부품 생산전문 통합계열사·모듈 생산전문 통합계열사)로 현물출자 하면서 몸집을 축소했다. 일각에서는 현대모비스가 또 다시 현대글로비스와 분할·합병을 추진할 경우 현물출자로 기업이 쪼개진 현대모비스의 주가가 내려가면서 현대글로비스 주주가 수혜를 보는 것 아니냐며 경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물출자는 자신의 사업부문을 떼어내 독립시키고 그 지분을 주주가 아닌 분할 후 존속회사가 가져가는 물적분할과 방식과 유사하다. 물적분할의 경우 시장에서는 악재로 받아들여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현대모비스가 지난 9월 KT에 지분율 1.46% 규모의 자사주를 매각해 의결권을 살린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분할합병을 진행하려면 상법 530조의 3에 따라 주주총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승인 결의는 시행령 제434조 규정에 따라 출석한 주주의 3분의 2 이상의 수와 발행주식총수의 3분의 1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을 단행할 경우 KT가 현대모비스 주주로서 백기사 역할을 해준다면 현대모비스에서 나오는 분할합병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상쇄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규복 신임 대표의 선임 배경으로 주가 부양이 거론된다. 다만 이규복 신임 대표가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우선 경영 환경이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차그룹에서 생산하는 자동차, 부품 등에 대한 해운을 담당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한다.
올해 환율 상승에 따라 입었던 수혜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투자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현대글로비스의 사업은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면 물류사업부문의 원화 기준 해외법인 매출과 이익이 감소되고, 반제품조립(CKD) 사업부문 마진률이 악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올해 환율은 줄곧 상승세를 기록했다. 지난 1월 1190원대를 오르내렸던 원·달러 환율은 지난 9월 30일 1445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12월 8일 기준 1321원으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연초 대비 11.0% 상승한 수준이다.
하지만 환율이 정점을 지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원일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달러 강세 요인들이 조금씩 진정되고 있는 만큼 원·달러환율 역시 과도한 오버슈팅 영역을 빠르게 탈출하고 있는 모습”이라며 “내외적 요소를 감안할 때 원·달러환율의 추세적 전환 및 추가 하락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글로벌 경기 악화에 따라 소비 여력이 떨어진 고객들이 자동차 구매를 줄이려는 모양새도 부담스럽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원은 내년 한국 자동차 수출은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시행 여파와 소비 위축 등의 영향으로 올해보다 4% 줄어든 210만 대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대차와 기아의 차량 판매에 녹록지 않은 경영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현대차그룹 자동차 물량을 운송하는 현대글로비스에도 악재다.
친환경 정책에 따라 현대차그룹의 사업구조가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전환하면서 현대차가 생산공장을 미국으로 옮긴 점도 현대글로비스에는 좋지 않은 부분이다. 미국은 현대차의 주요 판매 국가다. 현대차는 지난해 기준 미국에서 78만 대를 판매했다. 미국 공장 생산 능력이 37만 대 수준인 점을 생각하면 나머지 물량 41만 대가량은 다른 공장에서 생산된 자동차를 해운을 통해 탁송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현대차는 2020년 완공을 목표로 30만 대 생산능력을 갖춘 전기차 생산 공장을 설립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물량이 30만 대 더 늘어나는 셈인데, 해당 물량이 미국 판매량을 흡수하면 기존에 다른 국가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향하던 해운 물량이 크게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전기차로 전환할 경우 자동차를 구성하는 부품 수가 크게 축소되는 점도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전기차의 부품 수는 내연기관차의 65% 수준이다. 현대차의 자동차 부품 해운도 담당하는 현대글로비스에 달갑지 않은 일이다.
현대글로비스 관계자는 “경영 환경 변화에 따라 대응해 나갈 것”이라면서도 “대표이사 교체와 관련된 이야기는 따로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박호민 기자 donky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