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사상 첫 여성 CEO ‘파격’, 현대차·SK 미래 리더 힘 싣기…“초기 혼란기 지나 젊은 총수 지배력 강화” 분석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이 최근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3세대들이 모두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재용 회장은 1968년생, 정의선 회장은 1970년생, 구광모 회장은 1978년생으로 젊은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직 총수는 아니지만 1980년대에 태어난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 이규호 코오롱모빌리티그룹 사장 등도 올해 승진한 재계 후계자들이다. 지난해 사장에 취임한 정기선 HD현대 사장도 재계를 이끌 1980년대생 리더로 꼽힌다.
이러한 변화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최근 자산순위 상위 30대 그룹 계열사 267개의 임원현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 임원 숫자는 지난 9월 말 기준 1만 496명이다. 이는 지난해 말보다 1.6%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최고위 임원은 줄어들고 있다. 부회장은 지난해 말 54명에서 올해 9월 말 48명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 사장도 300명에서 277명으로 감소했다. 회사의 미래를 이끌 상무·전무·부사장 급 임원이 늘고 사장·부회장 급 최고위 임원은 줄어든 셈이다.
#사상 첫 여성 CEO 등장한 LG그룹
LG그룹이 지난 11월 24일 단행한 정기 임원 인사는 ‘파격’으로 요약된다. 우선 18년 동안 K-화장품 신화를 쓴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이 물러났다. LG생활건강은 이정애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대표이사를 맡기로 했다. 이정애 신임 대표는 LG그룹 역사상 첫 여성 최고경영자(CEO)다. LG그룹의 광고 계열사 지투알도 여성인 박애리 부사장이 신임 대표로 선임됐다. 보수적인 기업문화로 유명한 LG그룹의 변신을 상징하는 인사라고 할 수 있다.
LG그룹에는 여성 발탁뿐 아니라 세대교체의 움직임도 보인다. 신규 임원 대부분이 젊은 층으로 물갈이됐다. 올해 LG그룹 신규 임원 92%가 1970년 이후 출생자다. 심지어 우정훈 LG전자 수석전문위원은 1983년생으로 만 39세에 불과하다.
이번 인사를 두고 내년 취임 5주년을 맞는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본격적인 임원 ‘물갈이’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전 세대 공신들이 물러나고 여성·젊은층·미래 사업 위주로 승진시킨 것”이라며 “권봉석 LG 부회장,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 등 주요 부회장단은 유임됐지만 권불십년인 만큼 장기적인 추세를 역행하긴 힘들다”고 평가했다.
#현대차와 SK에도 세대교체 바람
정의선 회장 체제 2년 차를 맞은 현대차그룹은 지난 11월 30일 이른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현대차그룹은 통상 12월 말 인사를 진행했지만 올해는 한 달가량 앞당겼다. 이번 현대차 사장단 인사에서는 공영운 전략기획담당(1964년생), 지영조 이노베이션담당(1959년생), 김정훈 현대글로비스 대표(1960년생) 등 사장 3인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반면 1965년생인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그룹 CCO(최고창조책임자)는 사장으로 승진했다. 또 ‘재무통’으로 불리는 이규복 현대차 프로세스혁신사업부 전무(1968년생)가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현대글로비스 대표를 맡게 됐다. 현대차그룹은 미래 모빌리티 분야 컨트롤타워인 GSO(Global Strategy Office) 조직도 신설했다. 정의선 회장 취임 후 공석인 부회장 자리는 이번에도 승진자가 없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올드보이’들이 자리를 내주고 외국인 사장이 승진하며 정 회장의 직속 그룹 컨트롤타워가 신설됐다”며 “승계구도 열쇠인 현대글로비스에 재무통 이규복 대표가 임명된 점 또한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지난 12월 1일 인사를 통해 혁신 의지를 내비쳤다. 겉보기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기존 부회장단의 실권이 줄어들고 미래 리더들에게 힘을 준 인사다.
SK그룹은 기존 부회장단 8명을 모두 유임시켰지만 의사협의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에는 큰 변화를 줬다. 장동현 SK(주) 부회장,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 등이 수펙스추구협의회 위원장에서 물러난 것이다. 이들이 맡았던 수펙스추구협의회 위원장 자리는 장용호 SK실트론 사장, 유영상 SK텔레콤 사장, 박상규 SK엔무브 사장, 조경목 SK에너지 사장 등이 이어 받았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부회장들의 면을 살려주는 동시에 실질적인 권한은 미래를 이끌 사장단에게 넘긴 것”이라며 “겉보기에는 부회장단 전원 유임이지만 실상은 중장기적인 세대교체의 신호탄”이라고 분석했다.
#재계 이목은 삼성으로
각 대기업이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면서 삼성전자에 재계 이목이 집중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회장 승진 후 첫 임원 인사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지난 11월 말 2023년 임원인사 안을 보고 받았지만 반려했다는 뒷말도 나온다. 이 회장이 대대적인 쇄신을 주문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구축한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과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의 ‘투톱 대표이사’ 체제와 정현호 사업지원TF 부회장 체제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미래를 이끌 사장단에는 ‘뉴페이스’ 등장이 예고돼 있다. 우선 갑작스럽게 사임한 이재승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사장의 후임 인선이 급선무다. 한종희 부회장이 겸직 중인 영상디스플레이(VD) 사업부장 자리에도 새 인물이 등장할 전망이다. 김원경 글로벌대외협력(GPA) 팀장 부사장 등 이재용 회장 측근도 사장 승진이 예상된다. 삼성그룹의 다른 계열사 대표 자리도 유동적이다. 60세 이상 임원들은 물러나는 ‘60세 룰’에 따라 대규모 인적 쇄신이 예상된다. 내년에 60세 이상이 되는 부사장은 삼성전자에만 약 20명에 달한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주요 대기업 CEO 교체는 적지만 전 세대 부회장들이 물러나거나 입지가 줄어들고, 젊은 사장과 임원들이 약진하는 인사”라며 “새 총수가 들어선 기업은 초기 혼란기를 지나 총수의 지배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민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