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23일 방송되는 KBS '자연의 철학자들' 39회는 '오늘도 늪배를 젓는다' 편으로 우포늪이 삶의 터전이자 영혼의 스승이라는 우포늪의 마지막 어부, 석창성 씨의 철학을 만난다.
경상남도 창녕군에 우포늪이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천연 늪으로 인위적 훼손이 거의 없는 원시 습지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수많은 철새의 안식처이자 43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우포늪은 1997년에는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1998년에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생태 보호구역이다.
그 때문에 동력선을 띄울 수 없어 허가를 받은 단 8명의 어부들만이 긴 장대를 저어 움직이는 '늪배'를 타고 붕어, 잉어, 가물치 등의 고기를 잡으며 산다. 그 중 한 사람이 젊은 시절부터 우포늪의 어부로 살아온 부친 석대판 씨(83)의 뒤를 이어 어부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석창성 씨(49)다.
그가 매일같이 오르는 늪배는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만큼 작고 좁다. 그러나 그곳은 그만의 천국이자 소우주란다. 우포늪의 상징과도 같은 안개 속에서 늪을 가르고 있노라면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창성 씨.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모습을 선사하는 우포늪을 보는 삶. 그 특권을 매일 누리며 창성 씨는 오늘도 우포늪과 함께 산다.
부친의 뒤를 이은 어부라 하니 평생 우포늪에서만 살았을 것 같지만 그는 도시에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어부 일을 시작했다. 번듯한 직장을 포기하고 귀향을 택한 이유는 그에게 도시는 즐거운 곳이었지만 동시에 버텨내기 벅찬 정글과도 같았기 때문이라고. 어려운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고향을 떠올리며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치유했다는 창성 씨.
그러다 마침내 모든 것에 대한 답이 이미 자연에 있는데 도시에서 더 이상 삶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인 우포늪과의 동행을 시작했다.
석창성 씨는 게으르게 물고기를 잡는 어부다. 그에겐 '어부는 생명을 거두어 먹고사는 직업'이라는 무거운 마음이 늘 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만큼만 잡고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철칙은 부친에게서 왔단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우포늪에 나가면 늘 첫 고기는 놓아주시던 아버지. 어부가 되어 돌아보니 '저것이 어부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아버지가 몸져누운 이후 함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어도 늘 배운 것을 되새기며 욕심을 비우는 연습을 한다. 그것이 자연 앞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어부의 자세일 것이다.
우포늪을 거닐다 보면 지난해에 만난 나무와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난다는 석창성 씨. 익숙한 듯 보여도 나무에는 매 해 다른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있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매번 다른 우포늪이 펼쳐진다.
창성 씨는 사람이 우포늪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듯 보여도 늪의 주인은 나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왔다. 거친 태풍을 견디고 굳건히 살아남아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는 나무들. 작년에도, 10년 전에도, 어린 시절에도 나무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건 기억할 수 있는 장소에서 나무들이 기다려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치열하게 생존하는 건 나무만이 아니다. 모르는 이가 보면 기름기처럼 보일 우포늪 수면 위 포자 또한 지난여름 생이가래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우포늪의 또 다른 생명인 어부 석창성 씨는 늪과 함께 인생을 돌아본다. 그들만큼 치열하고 우직하게 생을 감당했는지. 우포늪의 일원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는지. 매일 묻고 매일 새 마음으로 그물을 내린다.
우포늪에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오고 어부는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한다. 배를 보수하고 '저어가는 대나무' 라는 뜻을 가진 늪배 전용 노, 점죽을 찾아 나선다. 우포늪 어부들이 타는 늪배의 수명은 4년에서 5년. 적절한 보수와 제작이 주기적으로 필요하다. 이전에는 아버지와 해왔던 일인데, 이제는 그의 장인 백정상 씨(69)가 그의 일손을 돕고 있다.
평생을 대구에서 목수로 지내다 얼마 전 창성 씨 부부의 근처 마을로 귀촌한 장인 백정상 씨(69)는 창성 씨의 든든한 조력자다. 늪배 제작에서 중요한 과정 중 하나는 배를 늪에 빠뜨려 보는 일이다.
배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물을 먹여 주는 일이 중요하단다. 너무 마르면 뒤틀리고 그렇다고 물속에 너무 오래 두면 썩어버린다고. 그런 늪배의 성질을 보며 창성 씨는 고집부리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발 맞춰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한다. 엉킨 그물을 푸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꼬일 대로 꼬인 그물이 때론 인생의 문제 같다.
풀기를 시도해 보지만 정녕 풀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 머리가 복잡해질 때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실마리가 보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쓸 수 있게 풀리는 과정을 체험하다보면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것이라고 자연이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석창성 씨는 그렇게 우포늪에서 살고, 우포늪에서 삶을 보며, 우포늪과 함께 산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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