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포스코·신한금융·우리금융 CEO 압박…실효성 의문 시, 공정위·금감원이 나설 가능성도
#대표 선임에 관여하는 국민연금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등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 중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기업은 2022년 말 기준 281곳이다. 이 중 국민연금이 주요주주인 기업은 8곳으로 KT(지분율 10.35%), 포스코홀딩스(8.99%), 하나금융지주(8.40%), 네이버(8.29%), 신한금융지주(8.29%), KT&G(8.03%), KB금융(7.94%), 우리금융지주(7.86%) 등이다. 우리금융지주의 경우 우리금융우리사주조합과 우리은행우리사주조합이 각각 5.34%, 4.4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공식적으로는 우리금융우리사주조합 및 특수관계자가 최대주주다. 나머지 7곳은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다.
KT와 신한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는 현재 차기 대표 선임 과정에 있다. 이런 가운데 국민연금은 이례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은 지난 12월 8일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스튜어드십코드 강화를 천명했다. 김 이사장은 “(소유분산기업) 회장 등을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고착하고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는다든지, 현직자 우선 심사 같은 차별과 외부 인사 허용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소유분산기업의 합리적 지배구조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긴장하는 기업들
서원주 국민연금 신임 기금운용본부장(CIO)은 지난 12월 17일 간담회를 자청해 “KT나 포스코, 금융지주 등 소유분산 기업 최고경영자가 객관적이고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선임돼야 ‘셀프·황제 연임’ 우려가 해소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 서원주 CIO는 12월 28일에도 KT 이사회가 구현모 KT 대표의 연임을 결정한 것과 관련해 “경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에 부합하지 못했다”며 “의결권 행사에서 이러한 사항을 고려하겠다”고 받아쳤다. 국민연금이 특정 기업 CEO 인사에 기금운용본부장 명의 입장문을 낸 것은 1999년 기금운용본부 출범 후 처음이다.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언급함에 따라 KT 대표 선임은 오는 3월 주주총회 표대결로 이어질 전망이다.
서원주 CIO가 언급한 포스코도 긴장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은 2021년 초 주주총회에서 2024년까지 연임을 확정했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포스코는 이구택, 정준양, 권오준 전 회장이 정권 2년차마다 사퇴하는 징크스를 겪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인한 침수 사태 등을 겪으면서 포스코를 바라보는 여론도 차갑다.
국민연금은 당장 KT와 포스코를 타깃으로 꼽았지만 금융지주의 경영권 향방도 오리무중이다.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최근 3연임을 앞두고 용퇴를 결정했다. 조 회장은 지난 12월 8일 오전 회장후보추천위원회 면접을 앞두고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면접 직후 급작스레 “세대교체를 위해 사모펀드 사태(라임 사태) 책임을 지고 용퇴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놓고 시점이 묘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한지주 회장 면접일은 마침 김태현 이사장의 기자간담회 날이었다. 이에 금융권에서는 ‘외압설’이 흘러나온다. 조용병 회장은 면접 당일 아침까지 부회장직 신설 등 조직개편을 언급했다. 그런데 면접장을 찾은 후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오는 3월 임기가 종료되는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경우 국민연금의 직접적인 압박은 없더라도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다를 바 없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1월 라임펀드 불완전판매와 관련해 손 회장에게 문책경고 상당의 조치를 내렸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12월 “(손 회장의 징계는) 여러 번에 걸친 심도 있는 논의 끝에 사실상 만장일치로 결론 난 징계”라며 “(조용병 회장은) 리더로서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는 이 원장이 조 회장의 사례를 들어 손 회장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들 4명의 대표들은 신년인사회 등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최정우 회장과 구현모 대표는 지난 1월 3일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신년인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조용병 회장과 손태승 회장은 같은 날 열린 범금융 신년 인사회에 불참했다. 재계와 금융권에서는 이들이 정권 눈치에 ‘자진 불참’한 것이라는 분석이 만만치 않다.
#말로 안 되면 힘으로?
국민연금은 매년 ‘스튜어드십코드 강화’를 언급해왔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대표 임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라고 할지라도 지분율이 높지 않아 그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최영희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해 10월 국민연금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한 안건은 △2019년 3278건 △2020년 3397건 △2021년 3378건 △2022년 1~7월 3297건이었다. 이 중 반대표를 행사한 건수는 △2019년 625건(19.07%) △2020년 535건(15.75%) △2021년 549건(16.25%) △2022년 1~7월 787건(23.87%)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국민연금이 반대 의견을 내고 부결된 안건은 △2019년 21건 △2020년 19건 △2021년 10건 △2022년 1~7월 10건에 불과했다. 반대표를 행사한 2496건 중 실제 부결된 사례는 60건으로 2.4%에 그쳤다. 재계 한 관계자는 “그간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은 주주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정치논리에 따른 사안이 많았다”며 “소유분산기업은 외국인 주주들이 절대다수인 만큼 주가와 관계없는 국민연금 입장에 찬동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현직 대표가 외국인 주주의 표심을 붙잡는다면 국민연금의 계획도 뜻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셈이다.
이 때문에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나 금융감독위원회 등 감독기관이 움직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공정위는 현재 KT텔레캅의 일감 몰아주기를 조사하고 있다. 금융지주들은 라임·DLS(파생결합증권) 사태 등으로 중징계를 받았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정권 초기인데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사정당국의 힘이 강한 정권”이라며 “스튜어드십코드는 명분일 뿐 찍어내기가 노골화된다면 소유분산기업 대표들이 버텨내는 데 한계가 명확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 국민연금은 관계자는 “보도설명자료에 나온 내용 이외에는 따로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12월 구현모 대표의 연임과 관련해 “‘CEO 후보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입장”이라며 “앞으로 의결권 행사 등 수탁자책임활동 이행과정에서 이러한 사항을 충분히 고려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민영훈 언론인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