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킴이 참새’가 ‘떠돌이 까치’ 제쳤다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지난 10년간 대한민국 증권업계의 주인공 열전이다. 금융위기 전만 해도 주식은 대우, 펀드는 미래에셋이란 공식이 성립할 정도로 업계의 간판이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개별주식투자와 펀드의 몰락으로 대우·미래에셋 ‘커플’의 시장 지배력은 자문형 랩을 앞세운 삼성증권으로 넘어갔다. 이어 지난해 자문형 랩의 몰락과 무리한 해외투자로 여의도의 패권은 한국증권과 키움증권으로 옮겨가는 모습이다.
2011회계연도 3분기(2011년 4월~2011년 12월) 누적순이익은 한국증권이 1810억 원으로 삼성증권(1474억 원)과 현대증권(1469억 원)을 제쳤다. 키움증권은 974억 원으로 우리투자증권을 제치고 5위에 올랐다. 특히 키움증권은 자산은 3조 6363억 원, 자기자본은 7779억 원에 불과하지만, 1000억 원에 가까운 순이익을 냈다. 자산은 20조 원에 달하고 자기자본은 3조 원이 넘는 초대형 증권사를 압도하는 수익성이다.
시가총액 순위를 봐도 한국증권이 속한 한국금융지주는 우리투자를 제치고 3위에 등극할 것이 유력하며, 키움증권은 대신, 동양에 이어 미래에셋증권까지 제친 데 이어 이젠 5위인 현대증권을 위협하고 있다.
그럼 한국증권과 키움증권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증시 전문가들은 가장 먼저 최고경영자(CEO)를 꼽는다. KDB대우, 삼성, 우리투자, 현대, 미래에셋 등은 모두 최근 대표이사가 바뀌거나 바뀔 것이란 관측이 많은 곳이다. 특히 KDB대우, 삼성, 현대, 우리투자 등은 최근 CEO 가운데 연임한 경우가 없다. 3년마다 CEO가 바뀌다 보니 회사 경영방향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익명의 증권사 CEO는 “삼성과 함께 ‘빅3’로 통하는 KDB대우증권과 우리투자증권 CEO 인사는 정치판을 방불케 한다. 모기업인 금융지주 회장이 정권 측근이다 보니 이들 측근과 가까운 이들이 CEO로 오는 경우다. 이러다 보니 회사보다는 끌어준 모기업 회장에 충성을 하기 마련이고, 회사 내에서도 성과보다는 이들 ‘라인’을 잡는 데 더 열심이다. 회사가 잘될 턱이 없다”고 꼬집었다.
실제 KDB대우증권은 김성태 전 사장에서 임기영 현 사장으로 바뀐 후 실적이 줄곧 내리막이다. 2009회계연도 3191억 원이던 순이익이 2010회계연도에는 2562억 원으로, 2011회계연도 3분기에는 967억 원대로 줄었다. 자기자본 3조 8742억 원을 은행에만 넣어놔도 1년에 1500억 원 이상은 벌 수 있는데, 그만도 못한 셈이다.
▲ 여의도에 위치한 한국투자증권(왼쪽)과 키움증권.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반면 한국증권은 2007년부터 5년째 유상호 대표가 이끌고 있다. 권용원 현 키움증권 사장도 2009년부터 4년째 키움증권을 이끌고 있다. 특히 두 회사 모두 오너 기업이란 공통점이 있다. CEO를 정하는 데 ‘오너 기준’의 효율성과 합리성만 있으면 된다. 외압이나, 인맥의 작용 소지가 낮다.
한국증권과 키움증권의 또 다른 특징은 쏠림 현상이 적다는 점이다. 지난해부터 개인들의 직접투자 위축과 펀드 인기 하락으로 각 증권사 지점의 영업실적은 바닥을 기고 있다. 그나마 채권 등 본사 투자에서 번 돈으로 지점 적자를 메우는 상황이다. 그런데 한국증권은 거의 유일하게 지점영업 흑자를 기록 중이다. 펀드판매와 자문형랩, 직접주식투자자의 위탁매매 부분을 골고루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CEO가 정치바람이나 인맥관리에 한눈팔지 않고 지점관리 등에 매진한 것도 보이지 않은 원동력이 됐다.
키움증권의 경우 온라인전문 증권사여서 아예 일반 지점이 없다. 즉 지점적자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부의 각종 수수료 인하정책으로 키움증권의 점유율에는 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게다가 지점 비용 등에 대한 부담이 없다 보니 본사에 우수한 투자은행(IB) 인력을 유치했고, 이는 본사부분의 실적개선으로 이어졌다.
대형증권사 가운데 현대증권과 미래에셋증권, 대신증권 등의 실적이 KDB대우나 우리투자보다 나은 것도 그나마 오너가 있다 보니 외압이나 정치바람에 CEO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증권과 대신증권의 부진은 아직 경영경험이 짧은 오너라는 실험을 거치고 있고, 미래에셋은 그룹의 주력을 자산운용과 해외로 돌리며 세대교체를 진행 중인 탓이 크다.
물론 그렇다고 오너가 택한 전문경영인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삼성증권이 대표적인 경우다. 지난해 말 삼성증권에서 삼성자산운용으로 옮긴 박준현 사장은 자문형 랩 돌풍을 일으키면서 시장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자문형 랩으로의 지나친 쏠림을 방치해 지난해 하반기 고객에게 막대한 평가손실을 안겨줬다.
여기에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던 해외사업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동안 홍콩법인은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인만 대상으로 영업을 했는데, 아시아 지역 주식에 투자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영업대상을 넓힌 것이다. 글로벌 금융업체들과 경쟁하기 위해 무리한 몸값을 치르면서 영업 인력과 리서치 인력을 뽑았지만, 수십 배나 덩치가 크고 오랜 기간 기반을 다져온 기존 경쟁사들의 철옹성을 넘지 못했다.
증권사 해외영업 관계자는 “최소 5년, 길게는 10년이 걸리는 일인데, 박 사장의 경우 이를 3년 내에 해치우려 무리하게 초기 자본투입을 늘렸다. 자문형 랩에서 번 돈을 그리 다 부은 셈인데 자문형 랩이 삐끗했다. 아직 성과가 나오려면 먼 상황에서 그 많은 돈을 계속 부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성증권은 한때 박 전 사장의 경쟁자로 꼽혔던 김석 사장 체제로 바뀐 후 강도 높은 변화를 겪고 있다. 훼손된 수익성을 회복하고, 쏠림 현상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 같은 내부문제 때문에 시장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해 주도권을 회복할 시기는 다소 늦춰질 것이란 분석이 많다.
한편 삼성증권 박 전 사장의 고교 동창인 임기영 KDB대우증권 사장은 최근 삼성증권이 철수한 해외사업에 공격적으로 뛰어들기로 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삼성의 빈틈을 노리겠다는 전략이지만, 워낙 많은 돈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업인 만큼 업계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게다가 임기 말인 임 사장의 연임 여부가 불투명해 해외사업전략이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