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몸으로 뛰는 보기드문 여걸
▲ 오리온그룹 이화경 사장. | ||
여기에서 보듯 그룹 분리 뒤 오리온그룹의 자산 증액은 대부분 새로 진출한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외식사업에서 나왔다. 신규사업이 성공했다는 얘기다. 이 신규사업의 조타수는 이화경 오리온그룹 사장이다.
이 사장은 오리온그룹의 실질적인 오너다. 주력사인 오리온의 지분을 보면 이 사장이 14.66%로 최대주주이고, 담철곤 회장이 13.06%로 2대주주, 이 사장의 어머니인 이관희씨가 2.69%로 3대 주주다. 오리온그룹의 지배구조는 대부분 (주)오리온이 계열사를 수직지배하는 단출한 구조다. 때문에 지분상으로만 놓고 보면 이 사장이 오너인 셈이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은 이 사장의 남편이다. 아들이 없는 이양구 회장은 동양그룹을 큰사위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과 둘째 사위 담철곤 회장에게 넘긴 셈이다. 두 딸 중 실질적으로 경영에 관여하는 것은 이화경 사장이다. 그는 우리나라 재계에 거의 유일무이한 부부 공동경영 사례를 기록해나가고 있다. 명목뿐인 경영자가 아니라 실제 현장 경영에 참가, 팀장 회의를 주재하고 자질구레한 현장 실무까지 직접 챙기는 경영자다.
경영자 이화경
그는 용산 문배동 동양제과에서 근무하던 시절 투유초콜릿 캠페인과 ‘따조’라는 장난감을 넣는 마케팅을 기획했다. 초코파이 광고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정(情)’ 캠페인과 최근에는 <내이름은 김삼순> 붐을 패러디한 초코파이 광고도 그의 작품이다.
때문에 오리온 쪽에서는 그를 ‘실무적인 경영자’라고 소개한다. 명목뿐인 일은 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름을 걸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이씨 가문의 가풍인 듯싶다.
이 사장의 부친인 이양구 회장은 75년 이 사장이 22세 때 그를 구매부 평사원으로 입사시켰다. ‘경영자가 되고 싶다면 구매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양구 회장은 ‘내 딸이라고 특혜는 없다’라는 얘기를 이 사장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이런 실무 중시의 담백한 가풍은 지난 89년 창업주 이양구 회장이 별세한 뒤 동양그룹과 유족들이 펴낸 <동양보다 큰 사람>이라는 이양구 회장 추모집에서도 드러난다. 이 추모집은 이양구 회장의 일생과 경영에피소드를 담아냈다. 하지만 이 책은 여느 재벌 회장의 추모집처럼 상찬과 미사여구 일색으로 도배되지 않은 특이한 책이었다. 웬만한 재벌가에서 흠이라고 여길 법한 사연도 가감없이 모두 실어 재벌가 회고록의 또다른 전범이 되고 있는 것.
이 사장은 지난 2001년 그룹 분리 이후 온미디어와 영화사업체인 미디어플렉스, 외식업체인 롸이즈온의 경영책임을 맡아 역삼동과 분당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그는 팀장 회의까지 직접 챙긴다. 대개 오너들이 계열사 사장들의 보고나 받는 것과는 판이하다.
▲ 1993년 2월 담철곤씨의 동양그룹 부회장 승진 축하연을 가졌다. 왼쪽부터 이혜경 동양매직 고문·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부부,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 이화경 오리온그룹 사장·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부부. | ||
하지만 2005년 흥행 1~3위인 <웰컴투동막골>, <가문의 위기>, <말아톤>이 모두 남이 버린 기획을 미디어플렉스에서 가져가 성공시켰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람장사’라는 영화판에서 미디어플렉스의 경쟁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장은 지난해 10월 세 편의 영화로 관객동원력 1위가 확실시되던 때에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지금껏 그것이 사업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틀렸다’와 ‘맞았다’에 얽매이지 않았다.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세상의 일이며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도 어떤 영화인지,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예술 영화는 좋고 코미디 영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라며 “영화가 세상과 어떻게 교류하고 있으며 어떤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영화 투자사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인생이란 정답이 없는 것, 정답에 가장 가까운 것을 찾아가는 게 경영’이라는 말을 그는 즐겨한다.
그의 이런 경영능력은 외부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지난 98년 2월 스위스 경제포럼에서 미래의 세계지도자로 선정되기도 했고, 지난 2003년엔 ‘100대 기업 비서들의 설문조사’에서 ‘신세대 여비서들이 모시고 싶은 CEO’로 뽑히기도 했다. 평사원에서 구매부, 조사부, 마케팅부를 두루 섭렵하고 지금도 현장 팀장들과의 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그의 스타일이 호평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이 사장은 올해 미디어플렉스와 온미디어를 기업공개해 경쟁사에 비해 취약한 자금력을 보강할 계획이다. 경쟁사는 물론 CJ엔터테인먼트. 공교롭게도 CJ에선 2세 경영자인 이미경 부회장이 버티고 있어서 미디어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여걸 대결이 호사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딸·아내 이화경
이화경 사장의 타고난 자산은 동양그룹 창업주 이양구 회장의 둘째딸이라는 점. 이양구 회장은 딸에게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던 듯싶다.
이 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지금도 일을 하면서 내 안의 아버지를 자주 느낀다, 어려운 결정을 할 때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영감을 얻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애틋한 그리움의 대상이자 벤치마킹 대상이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이 사장은 부친을 닮아 호탕하고 도전정신이 강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오리온에서 내놓는 그의 사진을 보면 재벌가 경영인의 근엄한 영정풍 사진과는 거리가 멀다. 화려한 색상과 대담한 무늬의 옷,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자세 등 기존 재벌가나 경영인들이 표준적으로 제공하는 사진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일종의 자신감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장에게 아버지 이양구 회장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은 그의 모친인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이다. 이관희씨는 두 딸에게 오롯이 동양그룹의 경영권이 넘어갈 수 있도록 외풍을 막아주는 바람막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금도 이관희씨는 성북동 330번지 일대 두 딸 집 근처에 살고 있다.
▲ 이화경 사장이 주도하는 미디어플렉스가 제작 배급한 영화 <웰컴투동막골> <말아톤> <가문의 위기>의 주인공(왼쪽부터)들. | ||
이 사장은 남편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과 재벌가에선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다. 담 회장은 화교로, 타이완 태생인 부친이 대구에서 한의원을 하던 유복한 집안 출신이다. 대구에서 서울로 유학온 담 회장은 중학교 3학년 때 서울외국인학교에서 같은 반 친구로 이 사장을 처음 만났다. 이때부터 연애를 시작한 이들은 10년 열애 끝에 지난 80년 결혼해 1남1녀(경선, 서원)를 뒀다. 그 사이 떨어져 있던 시간은 담 회장이 미국 조지워싱턴대로 유학을 갔던 4년이 전부. 그 기간에도 이들은 전화와 편지로 사랑을 확인했고, 화교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집안을 설득했다.
이 사장의 두 자녀 중 큰딸은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고, 아들은 국내에서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다. 성장기의 자녀를 둔 이 사장은 퇴근 시간 이후에는 외부인과의 약속을 잡지 않고 저녁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방법으로 가정생활을 이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웃해 사는 모친 이관희씨의 역할도 컸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이 사장 자녀를 포함해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정해 가족 간의 스킨십을 높인 것.
이 사장은 남편 담 회장에 대해 공동경영자로서, 부부로서, 눈빛만 봐도 통하는, 대화가 끊이지 않는 부부가 됐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공개된 그의 사진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의 자신감과 여유가 전해진다.
하지만 이 사장 스스로 ‘완벽하게 행복하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대신 그는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세상의 일이며 사업이라고 생각한다’고 표현했다. 그가 사업가로서 어떤 정답을 더 찾아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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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