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이어 연상호 감독과 재회…“평소 격투기 즐겨봐, 와이어 액션 이렇게 재밌을 수가”
“공개됐다는 게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짠한 마음도 들어요.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고 할까…. ‘정이’가 완성되기까지 아무래도 후반 작업이 많았는데 강수연 선배님의 모습을 계속 보면서 편집할 수밖에 없었던 연상호 감독님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싶고요. 선배님이 정말 더 (완성본을) 궁금해 하셨을 텐데, 아마 감독님도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더 애쓰고 공들였을 것 같아요. 선배님께 보여드리기 위해서요.”
1월 20일 공개된 ‘정이’는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이주한 쉘터에서 발생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의 뇌를 복제, 최고의 전투 AI(인공지능)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SF 액션 영화로 2022년 5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고 강수연의 유작이기도 하다. 극 중 김현주는 과거 내전에서 발생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낸 영웅이지만 전투 중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뒤 뇌 복제 기술을 통해 AI 양산형 로봇으로 재탄생한 정이 역을 맡았다.
“로봇이라 부자연스럽지만, 부자연스럽게 보이면 안 되는(웃음). 그 지점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을지 연구했던 기억이 나네요. 기능이 멈춰졌다가 깨어나는 장면을 연기할 때가 좀 힘들었어요. 감독님께서 ‘깊은 수면에 가라앉아서 숨을 못 쉬고 있다가 마지막 호흡이 남았을 때 깨어나는 느낌’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냥 편하게 눈을 뜨고 깨어나는 게 아니라 힘들게 깨어나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CG(컴퓨터 그래픽)의 도움도 물론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계속 멈춰 있는 상태로 연기했죠.”
적대 세력 로봇들과도 대등하게 전투하는 정이라는 캐릭터의 특성상 김현주는 특히 액션 연기에 공을 들여야 했다. 연상호 감독과 처음 함께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에서 먼저 액션 연기의 토대를 잡아 놨었기에 이번엔 수월하지 않았겠느냐는 연 감독의 말이 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김현주는 “그건 감독님 생각이지”라며 웃음부터 터뜨렸다.
“연 감독님이 제 훈련 일정은 알고 계셨지만 얼마나 많은 양을 소화하는진 아마 모르셨을걸요(웃음)? ‘정이’를 찍으면서 와이어액션을 처음 해 봤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제가 원래 또 액션을 좋아해요. 평소에도 격투기 경기를 챙겨볼 정도고, 저희 집에 샌드백이 있어서 스트레스 받거나 하면 치기도 해요(웃음). 옛날부터 몸으로 하는 연기를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이제까지 해오지 않은 것, 새로운 것, 내 한계점에 부딪칠 수 있는 걸 하고 싶었지만 그런 욕구에 비해 용기가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걸 연상호 감독님이 ‘지옥’부터 제안을 주시면서 제게 도전 정신을 일깨워 주신 거죠.”
‘정이’에서 김현주는 ‘대선배’ 강수연과 모녀 관계로 등장한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땐 자신이 딸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론 ‘역전된 관계’로 나온다는 게 오히려 흥미가 일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강수연이 맡은 정이의 딸 서현은 어머니의 뇌 복제를 이용한 AI 기술 연구소의 팀장으로 연구를 이끌지만 어머니의 모습을 한 로봇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조금씩 갈등하게 된다. 로봇 정이와 서현 사이의 인간애와 모성이 뒤섞인 이런 복잡한 감정선은 ‘정이’가 단순한 SF 액션만을 추구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이와 서현은 엄마와 딸의 관계지만 정이에겐 기억이 없는 상태죠. 두 캐릭터가 서로 대사를 많이 주고받진 않지만 각자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에 눈물 나는 지점들이 있었어요. 특히나 서현은 실험대상인 로봇 정이를 진짜 엄마라고 착각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감정적으로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니까요. 정이의 로봇들을 가지고 실험을 반복하면서 ‘저 사람도 괜찮았을까’ 생각했는데 서현이 로봇 정이에게 귓속말로 알려주는 장면에서 선배님이 제게 ‘나 이제 너 보면 눈물이 나’라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웃음). 서현이로서 선배님이 어떻게 감정을 참아왔고 또 끌고 왔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연상호 감독의 작품 세계관을 말하는 ‘연니버스(연상호+유니버스)’에서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히는 것은 신파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는 도전정신과는 별개로 모든 이야기가 인간애의 근본이면서도 활용하기도 매우 쉬운 신파 요소를 향해서만 흘러가기 때문에 ‘장르는 단순히 이용당했다’는 국내 비판이 연니버스 작품마다 따를 수밖에 없다. ‘정이’ 역시 디스토피아와 사이버펑크적인 화려한 요소를 가지고도 결국 모성에 기대는 결말로 끝났다는 데에 특히 국내 평단과 시청자들 사이에서 크게 호불호가 갈렸다. 앞서 이에 대해 많은 질문을 이미 받았던 김현주는 이런 비판을 이해한다면서도 “아마 그냥 SF 액션 장르였다면 굳이 저를 이 작품에 출연시키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답했다.
“예고편을 보신 분들은 SF 액션을 기대하셔서 실망하셨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그런 한국적인 감성이 어느 작품에서든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저희 작품은 그런 부분을 좀 덜어낸 게 아닐까요? 신파라는 건 ‘네가 내 딸이냐’ ‘엄마, 제가 서현이에요’ 하면서 더 격해졌을 수 있었으니까요(웃음). 시청자들에게 호응을 일으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완전한 실패는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장르를 시도해야 또 발전할 수도 있고, 저희 작품 뒤의 레퍼런스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흥행 부담을 내려놓은 뒤부터 ‘지옥’에 이어 이런 새로운 도전에 계속 불을 붙여가고 있다는 김현주는 현재 연상호 감독의 신작 미스터리 스릴러 ‘선산’을 촬영 중이다. 올해로 연기 생활 26주년을 맞이한 그는 오히려 20대 때보다 지금에 와서 작품을 보는 눈이 훨씬 넓어졌다고 말했다. 생각으로만 그쳤던 것들을 처음으로 행동에 옮기게 되면서 ‘김현주가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도 매일 느끼고 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2015년에 SBS 드라마 ‘애인 있어요’를 찍으면서 이제까지 내가 가짜로 연기를 하고 있었구나, 하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제가 정말 너무 작품과 캐릭터에 빠져서 연기하다 보니 ‘이게 진짜 연기지’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한편으론 이젠 그렇게 집중하지 않으면 좋은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책도 하게 돼요. ‘내가 이렇게 애를 쓰고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하는 연기가 좋은 연기일까’라는 고민도 들고…. 계속 그렇게 왔다갔다하는데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밸런스를 찾아가는 것 같아요. 제가 적절하게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치가 생겼다고 할까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