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있는 내면 연기와 성별의 한계 넘은 액션 눈길…출산 7개월 만의 복귀작 “쉰 만큼 올핸 더 일해야죠”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땐 반갑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이제까지 감정을 눌러 담으면서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어 했거든요. ‘원 더 우먼’처럼 제 분량이 많은 작품을 할 땐 ‘나는 래퍼’라고 생각하고 대사를 외웠었는데(웃음), 이번 작품에선 오히려 대사가 없더라고요. 표면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깊이 있는 차경의 감정선과 삶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에 공을 많이 들였던 기억이 나요.”
1월 18일 개봉한 스파이 액션 영화 ‘유령’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 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 받으며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진짜 ‘유령’의 멈출 수 없는 작전을 그린다. 중국 소설 ‘풍성’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 이하늬는 깊이 있는 내면 연기와 더불어 역대급 액션 연기까지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그는 박차경을 연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만일 차경이 1차적인 분노나 슬픔을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캐릭터라면 지금보다 오히려 접근이 쉬웠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인물은 사는 것조차도 삶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죽을 때를 위해, 죽기 위해서 사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삶을 제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게 어려웠어요. 저는 이렇게 찬란한 삶을 노래하면서 살았는데, 죽음을 위해 사는 삶은 도대체 어떤 삶일까. 내가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그 존재가 한 발의 총으로 완전히 덧없는 존재가 됐을 때, 그 다음 생을 어떤 의미로 끌고 가야 될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앞서 영화 ‘극한직업’과 드라마 ‘원 더 우먼’ 등을 통해 이하늬는 ‘강도 높은 액션 연기가 가능한 여배우’로 인정받아 왔다. 그런 만큼 맨몸과 총기 액션이 주가 되는 ‘유령’ 속 액션 신 역시 대역 없이 스스로 모두 소화해 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구토까지 할 정도로 강도 높은 액션 트레이닝을 받은 끝에 완성된 이하늬의 박차경과 그를 ‘유령’으로 의심하고 진실을 캐내려는 조선인 혼혈의 통신과 감독관 무라야마 준지(설경구 분)의 액션 신은 상대와 매끄럽게 합이 맞는 ‘스타일리시한’ 액션이라기보단 “너 죽고 나 죽자”는 ‘개싸움’에 가깝다. 체급과 성별에서 오는 장애를 넘어서 죽음을 각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 같은 처절한 액션은 ‘유령’이란 영화의 완성도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차경과 준지가 맞붙는 신은 액션 신이지만 한편으론 완전한 감정 신으로도 생각했어요. ‘용호상박’처럼, 에너지 끝판왕들이 모여 죽음을 놓고 포효하며 ‘네가 여기서 죽거나, 내가 여기서 죽거나’ 같은 느낌이었죠. 저로서는 그래서 ‘야! 적어도 진짜 밀리면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임했던 신이었어요. 박차경은 안 돼도 끈질기게 붙는 스타일인데 그건 그 당시 독립투사들이 다들 그랬을 것 같거든요. ‘나라라고 부를 만한 나라도 없어진 지 10년이 넘어가는데 왜 이렇게 끈질겨? 이제 그만해’ 이 말이 너무나 이성적이고 편하게 들릴 텐데도 거기서 계속 ‘안돼. 맞아도, 죽어도 돼. 몸의 어디가 나가도 괜찮아’ 하면서 대항하는, 그런 모습을 대변하는 느낌이었으면 했죠.”
겉보기엔 연약해 보이는 박차경이 6kg가 넘는 장총을 휘두르고 장정들과 주먹을 맞부딪쳐가며 몸싸움을 벌이는 것이 다소 ‘판타지스럽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하늬는 이미 이해영 감독으로부터 “마동석이나 다름없다”는, 액션배우에겐 극찬이나 다름없는 말을 들을 만큼 인정받은 몸이었다. 무라야마 준지와의 일대일 액션이 남녀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싸움으로 보인 것도 성별의 한계를 넘어선 배우의 노력과 타고난 신체(?) 덕이었다고.
“실제로 대학교 때 체육부 소속 남학생과 팔씨름을 한 적이 있는데 이겼거든요. 제가 골격이랑 힘이 좀 남다릅니다(웃음). 아마 그래서 감독님께서 제게 차경을 맡기신 것 같아요. 강인한 여성으로서, 꼭 남자와 여자가 맞붙는 것 이외에도 성별과 상관없이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몸에서 에너지 파동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차경의 액션 신 같은 경우도 멋있는 액션 신이 아니라 이 에너지로 ‘너희가 날 죽여도 되는데 그럼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이런 느낌의 에너지로, 진짜 끈질긴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는 느낌으로 촬영하고 싶었어요.”
‘유령’은 박차경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연대가 특별하게 그려진다는 점에서도 호평 받았다. 그와 함께 유령으로 의심받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박소담 분)와 항일조직 흑색단의 단원 난영(이솜 분), 그리고 박차경의 관계는 동지애 이상의 우정인 듯하면서 묘하게도 사랑 엇비슷한 감정에 닿아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항일이라는 큰 목적 아래로 뭉쳐져 뚜렷하게 비치다가도 다시 모호하게 돌아가는 이들의 관계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계속해서 곱씹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감독과 배우 역시 이들의 관계를 세세하게 정의하지 않고 어떤 해석이든 가능하도록 그 문을 열어놨다고 설명했다.
“감독님께서 차경과 난영, 차경과 유리코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해주시진 않았어요. 본인이 알아서 하면 된다고 하셔서 제가 해석한 대로 연기하겠다고 말씀드렸었죠. 이건 동지 이야기야, 자매 이야기야, 사랑이나 연인 이야기야 이렇게 특정하지 않고 그저 그 안에서 해석하는 대로 연기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아마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지 않았기에 더 복잡미묘한 관계가 나온 것 같아요. 남자와 여자였다면 연인으로 생각했을 텐데 여자와 여자이기에 상상의 폭이 넓어진 거죠. 그래서 관객 분들의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실지 그 반응이 정말 궁금해요.”
배우는 모든 작품에 애정을 갖기 마련이지만 ‘유령’이 이하늬에게 조금 더 특별한 건 아이를 출산한 뒤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다시 오르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출산 전에 촬영을 마치긴 했지만, 인생에서 가장 큰 이벤트를 겪고 다시 배우의 자리로 돌아오게 해준 작품인 만큼 의미가 남다르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출산을 경험한 뒤 ‘인간으로 태어나 이것보다 더 완성도 높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는 그는 앞으로 주어지는 모든 일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질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그저 저를 둘러싼 모든 일이 감사할 따름이죠. 한편으론 큰일을 겪고 나서 그런지 예전엔 익숙하게 해왔던 일들도 익숙하지 않게 느껴져요. 제작보고회 때는 낯설기까지 하더라니까요. 정말 오랫동안 그런(배우) 생활을 했는데 기억이 안 나고(웃음). 제가 이렇게 오래 쉰 적이 없었기도 했는데, 그런 만큼 아무래도 이전보다 편안해지고 또 여유도 생긴 것 같아요. 쉰 만큼 올해는 더 많이 일해야겠죠(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