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와 국민의힘 부정적 반응에 한발 뒤로…민주당 신중 기류 속 여성계는 입법 촉구
‘비동의 강간죄’를 두고 여가부와 법무부가 엇박자를 내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여가부는 1월 26일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을 발표하면서 비동의 강간죄 도입 검토 계획을 발표했다. 형법상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과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게 주요 골자다.
하지만 법무부가 “개정 계획이 없다”며 반박했고, 여가부는 돌연 철회했다. 발표 직후 9시간 만이다. 여가부는 “법무부가 계획이 없다고 해서 철회했다”며 번복 이유를 밝혔다.
여가부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에 관해 2022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여러 차례 각 부처 의견 수렴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법무부는 여가부 비동의 강간죄 개정안을 두고 ‘신중 검토’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는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고 해외 입법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포함해 성폭력범죄처벌법 체계 전체적인 사회 각층의 충분한 논의를 거치는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법무부가 여가부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진 않은 셈이다.
현행 형법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게 법조계 해석이다. 폭행 또는 협박 외의 이유가 있는 상태에서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을 경우 강간죄로 처벌하긴 어렵다는 뜻이다. 못한다. 반면 비동의 강간죄는 범죄 구성요건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본다.
비동의 강간죄는 2018년 9월 국회에서 처음 논의됐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018년 1심에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은 후다. 나경원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전 의원이 대표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시작이었다. 당시 법안 제안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의 경우, 위계 또는 위력의 행사에 의하여 간음이 발생하였음을 입증하기 어려워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 처벌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 또한 제기되고 있다. 상대방 의사에 반하여 간음한 경우 강간죄로 처벌하고, 폭행 또는 협박으로 강간죄를 범한 경우에는 가중처벌하도록 하며, 업무상 관계 등에서는 위계 또는 위력에 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상대방의 명시적 동의 없이 간음한 경우에는 처벌하도록 함으로써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지지부진한 논의 끝에 임기 만료 폐기됐다. 20대 국회에 발의된 비동의 강간죄 법안들이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21대 국회 이후로는 백혜련 민주당 의원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비동의 강간죄에 관해 법안을 내 2022년 11월 법사위 법안소위로 넘어간 후 계류 중이다.
여가부의 비동의 강간죄 입법안 발표 후 정치권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여당에선 반대 여론이 우세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1월 26일 “이 법이 도입되면 합의한 관계였음에도 이후 상대방 의사에 따라 무고당할 가능성이 있다”며 “피해자의 주관적 의사만으로 범죄 성립을 구성요건으로 할 경우 이를 입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며 도입에 반대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역시 본인의 페이스북에 “뭐? 비동간?”이란 짧은 글을 올렸다. 사실상 비동의 강간죄 도입 검토에 대한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으로 읽혔다. 여가부 폐지에 앞장섰던 이 대표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이에 맞서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본인의 페이스북에 “와! 비동간!”이라며 이 전 대표를 직격했다. 류 의원은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하면 무고한 남성의 인생을 망치는 ‘꽃뱀’이 늘어난다는 판타지와, 그 판타지를 믿는 일부 남성들의 키보드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존재한다”며 “현행 강간죄가 얼마나 많은 여성을 좌절케 하고,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모는지 한 번만 생각해보라”고 했다.
제1야당에서는 비동의 강간죄 입법과 관련해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이 민주당 내에서 총대를 멨다. 박 전 위원장은 1월 27일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가 강간이 아니면 무엇이냐”며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하려는 여성가족부의 계획을 국민의힘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거부했다. 이는 여성 인권을 후퇴시키는 만행”이라고 지적했다.
현재까지 민주당 내에서 비동의 강간죄와 관련해 공식적으로 논의된 적은 없다. 이재명 대표는 3·9 대선을 앞둔 3월 2일 비동의 강간죄를 두고 “신중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법안을 쉽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고, 사회적 합의 과정이 충분히 거쳐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여성계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촉구하는 한편, 정치권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에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200여 개 여성인권단체 연합체로 구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는 1월 27일 성명서를 내고 “비동의 강간죄는 성폭력을 해소하기 위한 세계적 추세”라며 “비동의 강간죄를 이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동의 강간죄는 유엔에서도 대한민국에 도입을 권고한 바 있다. 2021년 제47차 유엔 인권이사회가 채택한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가 강간의 과정에 있어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였거나, ‘저항이 현저히 곤란할 정도’였던 경우에만 처벌하는 대한민국 형법을 개정하라”고 했다. ‘폭행·협박’이 있어야만 강간죄가 성립되는 대한민국 현행법을 지적한 것이다.
설상미 기자 sangm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