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공룡 전쟁에 누리꾼이 총알받이
월드컵 응원곡으로 쓰겠다고 한 가수가 록으로 편곡한 ‘애국가’를 발표하자 누리꾼, 통신회사, 축구팬클럽, 음악인이 한데 엉켜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치마와 머리두건과 뺨의 문신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국가상징 태극기의 활용은 괜찮고, 또 다른 국가상징 애국가의 록 편곡은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 논란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2월 20일 윤도현 밴드가 록 버전의 애국가를 발표하자 이에 대한 찬반이 맞섰다. 신성한 애국가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느냐는 의견과 친근하게 부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이 맞섰으나 네티즌의 70% 이상이 ‘나쁘지 않다’는 의견을 보이면서 논란은 진정됐다.
이 과정에서 붉은악마 회원들이 윤도현 밴드에 대한 비난을 쏟아부으면서 논란이 가열되었고 윤도현 밴드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된 데는 월드컵을 마케팅 호재로 삼으려는 거대 기업 간의 대립이 원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윤도현 밴드가 애국가를 응원곡으로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데는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가수 윤도현의 노래로 유명해진 ‘오 필승 코리아’와 ‘아리랑’ 록버전을 윤도현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1위 통신사업자 SK텔레콤은 2002년 월드컵 공식후원사 자격을 획득한 KT그룹에 밀려 손을 놓고 있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SK텔레콤은 붉은악마의 후원사 자격으로 매복마케팅을 성공시켜 KT나 KTF를 능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광고를 통해 ‘붉은악마-응원광고-윤도현-SK텔레콤’이라는 연결고리를 내세우면서 ‘월드컵’이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월드컵 특수를 독차지했던 것.
하지만 이번에는 붉은악마의 공식 후원 자격을 KTF가 선점했다. 축구협회 스폰서도 KT그룹이 이미 독점하고 있었다. 가만있다가는 국가적인 이벤트인 월드컵에서 손을 놓아야 할 판이다.
상황이 이렇자 SK는 지난 월드컵 이미지 중 하나인 ‘거리응원’과 ‘윤도현’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록으로 편곡된 애국가가 나오게 된 것이다. SK텔레콤은 2월 21일부터 시작한 TV광고에서 윤도현이 직접 출연해 부른 애국가 록 버전을 배경음악으로 월드컵 마케팅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애국가를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누리꾼의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윤도현 밴드 측은 “애초 SK텔레콤의 요청이 있기 전에 만든 것이다. 애국가가 국민의 것인 만큼 저작권료를 요구하지 않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 상업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CF 출연은 SK텔레콤에서 먼저 제안이 들어왔기 때문에 응한 것일 뿐 KTF에서 제안이 먼저 왔더라면 거기에 응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SK텔레콤이 애국가를 이용한 TV광고를 월드컵 3개월도 더 남은 시점에 방영한 것은 3월 5일 KTF가 붉은악마와 공동으로 월드컵 공식 음반을 내는 것과 관련 있다. 말하자면 기선잡기라는 것. 공식 음반에는 마야, 버즈, 부활, 봄여름가을겨울 등이 참여했다.
윤도현 밴드 측은 KTF나 붉은악마 측으로부터 어떤 제안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붉은악마 측은 윤도현 밴드가 어떤 이유에선지 공식음반 참여를 거절했다고 밝히고 있다. 붉은악마 측은 “2002년 월드컵 직후 붉은악마 공식 앨범에 윤도현 밴드의 응원가를 싣자고 했는데 이를 거절한 적 있다. 당시 윤도현 밴드가 유명해진 것은 열심히 한 것도 이유겠지만 붉은악마를 비롯한 응원 열기에 힘입은 바가 크니 참여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들의 노래인 양 응원가를 부르고 다니는 것은 응원단에 대한 결례가 아닌가”라며 섭섭함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윤도현 밴드 측은 “우리가 부른 응원곡을 우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당시 저작권을 가진 이들이 윤도현씨에게 노래를 불러 줄 것을 요청해 가창비를 받고 불러줬을 뿐이다. 이후에도 저작권자의 허락을 얻어 콘서트와 앨범에 이용했을 뿐이다”라며 반박했다.
윤도현 밴드가 붉은악마가 기획한 월드컵 공식 앨범에 참여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양측 다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지만 붉은악마와 결별한 SK텔레콤이 윤도현 밴드를 오래전부터 별도로 접촉해 오지 않았냐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부분이다.
한편 붉은악마는 SK텔레콤에도 서운함을 표시하고 있다. 비영리 단체를 표방하는 붉은악마와 달리 SK텔레콤은 철저하게 기업논리로만 월드컵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원인이다. 붉은악마 측은 “지난 2002년 이후 SK텔레콤은 붉은악마에 대해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고 축구에 관심도 갖지 않았다. 경기 응원이나 행사 진행도 붉은악마나 응원단과 협의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막무가내로 집행하는 것을 따라올 것을 요구하는 식이었다”며 섭섭함을 표시했다.
붉은악마에 월드컵 행사 기획을 맡긴 KTF와 달리 SK텔레콤은 지난 1월부터 관련 부서에서 차출된 인원을 중심으로 TFT(태스크포스팀)를 만들어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다. 별도의 응원단을 꾸리지 않아도 “알아서 다 모일 것”이라며 응원전 열기를 주도할 것임을 자신하고 있다. 월드컵 용어나 응원가, 응원 구호 등 어떤 상징도 광고에 활용할 수 없음에도 길거리 응원을 콘셉트로 한 광고를 지속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월드컵 대표팀 국내 공식 후원사임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마케팅에서 뒤처지고 있는 KTF와 공식 후원사가 아님에도 한 발 앞선 기획으로 월드컵을 십분 활용한 SK텔레콤이 올해는 어떤 승부를 보일지도 또하나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