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9년 만의 첫 단독 주연 “주인공 욕심 없고 좋아하는 작품 계속하는 게 중요…언젠가 멜로도 해보고파”
“주조연의 조력자, 쳇바퀴가 굴러가게끔 옆에서 도와주는 기어가 아니라 시곗바늘이 됐다는 게 아무래도 가장 울컥한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또 감동 받았던 게 뭐였냐면 예전에 연극 하면서 주인공을 맡았을 때도 친구들에게 ‘내가 잘하는 것보다 다른 친구들이 잘할 수 있도록 만들면 그게 그렇게 좋더라’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영화에서도 그게 통하더라고요. 이번 작품도 저와 함께한 진해중앙고 복싱부 배우들, (오)나라 누나, (고)창석이 형 모두 너무 잘해주셔서 그분들의 연기를 보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좋았어요.”
진선규를 감동하게 만든 영화 ‘카운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 결승전에서 정당한 판정승으로 금메달을 따냈지만 ‘불명예 금메달리스트’로 조롱당했던 박시헌 전 복싱 국가대표 감독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선수 은퇴 후 '미친개'라고 불리면서까지 학생들의 계도에 힘쓰는 체육교사로 새 인생을 살며 다시는 복싱을 쳐다보려도 하지 않는 시헌은 천부적인 복싱 능력은 있지만 ‘빽’이 없어 부당한 패배를 맛봐 온 반항아 윤우(성유빈 분)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복싱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X새끼가 되겠다며 졸라대는 불량학생 환주(장동주 분) 등 오합지졸들을 모아 진해중앙고 복싱부가 탄생한다. 이들과 함께 불공평한 세상을 향해 시원한 한 방을 날리는 이야기를 레트로 감성에 버무려 그려낸 '카운트'는 웃음과 감동을 모두 잡아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2월 13일 진행된 ‘카운트’의 언론배급시사회에서는 영화와 함께 진선규의 뜨거운 눈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진선규는 “그날 진짜 슬퍼서 운 게 아니라 제가 받은 감동을 전해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울컥하고 혼자 감동해서 울어버렸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원래 리더 스타일이 아니에요. 누군가를 막 ‘으쌰으쌰’해 가면서 끌고 가는 대장 노릇을 잘 못 하는 사람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촬영에서도 홍보에서도 제가 뭔가 끌고 나가야 했잖아요(웃음). 맞지 않는 걸 해야 하다 보니 잘하고 있나 하는 의심도 들지만 그래도 하려고 애쓰는 제 모습이 저 같지 않다는, 처음 겪어 보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그랬는데 언론시사회 날 (박)시헌 샘이 카카오톡으로 문자를 주셨는데 ‘대한민국 최고 진선규가 링에 올라가는데 떨면 어떡합니까. 그러면 옆에 있는 선수들이 같이 떠니까 씩씩하게 하고 오세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 말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정말 울컥하더라고요.”
진선규를 울게 만들었던 박시헌 전 감독은 ‘카운트’의 촬영 기간(2020년 2월 25일~6월 24일) 동안 제주에서 훈련 스케줄이 잡혀 있어 자주 얼굴을 맞댈 수는 없었다. 훈련 시작 첫날과 크랭크인 날, 두 번을 만났다는 박 전 감독과 주로 전화와 카카오톡으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진선규는 박 전 감독에 대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는 한없이 순수하신 분”이라고 회상했다.
“사실 저는 ‘88서울올림픽’ 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러다 시나리오를 읽은 뒤에야 박시헌이란 인물을 찾아내고, 그 아픔을 알게 되면서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요. ‘카운트’에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대사가 ‘권투는 다운 당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카운트가 있다. 그러니 힘들고 고되면 그 자리에 잠깐 쉬었다가, 숨이 돌아오면 딛고 일어나 싸우면 돼’라는 대사예요. 박시헌 선생님의 가치관이나 지금 모습들이 담긴 대사 같았는데 그런 모습들도 저와 참 비슷하더라고요.”
‘카운트’ 속 시헌과의 닮은 점을 꼽을 때 진선규는 체육교사를 꿈꿨던 자신의 옛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다양한 운동을 배웠기에 체력에도 자신이 있었고, 특히 복싱은 결혼 뒤에도 꾸준히 배운 가락이 있었기에 현역 선수들만큼은 아니어도 제대로 ‘폼’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고 한다. 조카뻘인 성유빈을 비롯해 극 중 진해중앙고 복싱부 배우들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운동 덕이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유빈이하고 저는 계속 경기에 참여해야 하는 장면이 있어서 촬영하면서도 촬영장과 체육관을 오가면서 지냈어요. 그래도 두 달 동안 우리 진해중앙고 친구들과 함께 땀 흘리며 운동하고 같이 씻으면서 엄청 빨리 친해졌죠(웃음). 진해에서 촬영할 땐 중학교 2학년 복싱부 선수들하고 훈련을 같이 하기도 했는데 ‘중2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스파링도 해봤어요. 그런데 진짜 한 대도 못 때리겠더라고요(웃음). 저희 훈련을 봐주신 용인대 코치님과 그분 제자들과도 스파링을 했었는데 정말 저희 다 같이 돌아가면서 ‘뒤지게’ 맞았던 기억만 나네요(웃음).”
작품을 선택하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인 영화의 배경, 진해도 진선규에게 많은 추억을 되새기게 해줬다. 배우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뒤로했던 고향을 자신의 첫 주연작 촬영을 위해 돌아올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긴 시간 고향에 머물면서 인기로 인한 변화를 느꼈는지 묻자 진선규는 “저를 보고 ‘진해의 아들’이라고 해주신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고향 친구들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중에 제가 청룡영화제 때 언급했었던, 저에게 코가 낮아서 배우로 성공을 못한다고 말했던 친구도 있었어요(웃음). 이번엔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네가 코가 낮아서 이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야, 수술 안 하길 잘했다’(웃음). 또 식당 같은 데를 가면 예전엔 저를 모르셨는데 지금은 ‘진해의 아들’이래요(웃음). 그런 걸 보면 금의환향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자신은 똑같지만 저를 보시는 분들, 반겨주시는 분들의 느낌이 달라져서 저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아요(웃음).”
데뷔로부터는 19년,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킨 영화 ‘범죄도시’(2017)부터 손꼽아 세어도 6년 만에 단독 주연으로 우뚝 서게 된 진선규다. 주요 활동 무대가 연극에 집중돼 있었다곤 해도 능력에 비해 너무 긴 시간을 돌아왔다는 안타까움이 따르는 대중들의 반응에 대해 그는 “겸손하게 보이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짧은 시간에 단역에서 주역으로 뛰어오른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범죄도시’ 때만 생각해도 ‘저기’에 있던 애를 ‘여기’로 데려온 거라 이건 성장도 아니고 그냥 변화, 변신 그 자체였잖아요? 사실 생각해보면 너무 급하게 올라온 거죠(웃음). ‘카운트’를 보시고 ‘야 진선규 주인공감이다’, 아니면 ‘역시 진선규는 조연을 해야 해’ 하는 반응이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주인공을 꼭 해야지’라는 배우로서의 목표는 아예 없어요. 톱니바퀴가 되든, 시곗바늘이 되든, 시계가 되든 그건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봤을 때 ‘진선규는 조연 정도야’라고 결정해도 저는 상관 안 해요. 그저 좋아하는 작품을 계속 해 나가면 어느 순간 누군가는 또 제게 제안해줄 수 있으니까요. 멀고 먼 얘기겠지만 언젠가는 멜로도 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