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얼’ 연기와 복받치는 감정 연기까지…힙합 댄스 난관 만나 “난 춤을 잘 춰” 자기 세뇌도
“정주리 감독님의 시나리오는 읽을 때 여백이 굉장히 많아요. 배우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라!’라는 강요가 없으시죠. ‘도희야’ 때도 그랬지만 ‘다음 소희’ 역시 감독님의 글이 좋아서 단번에 반했어요. 이미 대본 첫 장을 읽을 때부터 ‘여전하시구나’ 하는 느낌이 오더라고요(웃음). 거기다 제가 항상 뉴스를 보면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주제와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주시니까 그런 여러 가지들이 잘 맞아 떨어져서 대본을 덮자마자 ‘이 작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월 8일 개봉하는 ‘다음 소희’는 실습생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취업전선에 내몰리지만 정식 노동자로도, 보호 받아야 할 학생으로도 취급 받지 못하는 고등학생들과 콜센터 직원들이 겪는 일상적인 폭력을 담은 영화로, 한국 영화 최초로 제75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된 작품이다. 2016년 발생한 전주 콜센터 현장 실습생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당찬 열여덟 고등학생 소희(김시은 분)가 현장실습에 나가면서 겪게 되는 사건과 이를 조사하던 형사 유진(배두나 분)이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강렬한 이야기를 그린다. 소희의 마지막 수개월을 되짚어나가는 유진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회를 향해 관객들을 대신해 날것의 분노를 폭발시키며 동시에 작품이 가진 메시지를 던지기도 한다.
“제가 좀 투사 같은 면이 있어서 이런 역할들을 좋아하나 봐요. 그런데 불의를 보면 어떨 땐 참기도 해요(웃음).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보다 제가 되고 싶은 역할을 연기하는 게 좋은데, 실생활에서 할 수 없는 걸 유진이라는 캐릭터가 해줘서 대리만족도 느끼고 너무 고맙더라고요. 심지어 분노한 연기를 할 땐 진짜 분노한 상태였어요(웃음). 보통 같으면 참으려고 할 텐데 ‘다음 소희’에선 날것 그대로 연기하면서 화도 어느 정도 내고 그랬던 것 같아요.”
관객들이 그런 유진의 감정선을 그대로 따라오게 하는 동시에 배두나는 그들이 유진이 아닌 소희에게 온전히 집중하길 바랐다. 유진이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중반부에서도 그가 소희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처럼 관객 역시 계속 소희를 떠올리도록 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작품의 여백을 굳이 제가 채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는 소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굳이 유진에 대해서는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지만 여백은 여백대로 놔두고 대신 제가 알아서 유진이의 백그라운드 스토리를 소설 쓰듯이 써내려 갔어요. 관객들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군데군데 그 캐릭터가 오래도록 생각해 온 것들을 대사로 치는, 그런 티가 나도록 연기했죠. 어떤 사정인지 관객들이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지쳐있는 표정이나 얼굴 상태로 짐작하도록 했어요.”
그의 말대로 ‘다음 소희’의 유진은 한없이 지치고 거친 얼굴로 등장한다. 이 캐릭터 역시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고, 그래서 소희의 일에 더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기 위해 정주리 감독은 배두나에게 “열흘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랬기에 얼굴 위로 그림자같이 내려앉은 다크서클과 기미도 분장이 아니라 원래 얼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배두나는 강조했다.
“유진이는 정말 많이 지쳐있고, 또 엄청나게 어두운 사람이지만 연기할 땐 크게 힘든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열흘 정도 못 잔 상태는 금방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냥 울고 나면 그렇게 ‘팅팅’ 부은 얼굴이 되거든요(웃음). 감정에 따라 얼굴의 빛이 달라지기 때문에 저는 ‘생얼’의 힘을 믿어요. 특히 마음을 들켜야 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땐 메이크업을 좋아하지 않죠. 심지어 귀걸이처럼 반짝이는 것도 착용 안 하고 ‘자, 내 눈을 보십시오!’하고 관객들에게 강요해요(웃음). 어쩌면 관객들은 ‘왜 설명을 안 해줘, 왜 이렇게 연기가 불친절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전 옛날 사람이라 고지식해요. 제 눈만 봐도 관객 분들은 다 아실 거라 생각하죠(웃음).”
복받치는 감정 연기와 ‘생얼’을 통한 얼굴 빛 연기는 모두 배두나의 장기였기에 비교적 간단하게 해낼 수 있었지만 딱 하나 넘지 못했던 산이 있었다. 힙합 댄스가 취미라는 유진의 설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각 잡힌’ 춤을 춰야 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어진다고. 머릿속으로 “난 진짜 춤을 잘 춰”라고 주입식 자기 세뇌(?)를 거치고 나서야 완성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원래 춤을 못 추는데 한 달 정도 배운 거예요, 전 막춤밖에 못 추거든요(웃음). 대본만 볼 땐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안무를 배워야 할지 몰랐는데 감독님이 저를 센터에 세우시더라고요. 위기감까지 느꼈다니까요(웃음). 무슨 진지한 힙합 전사냐고 여쭤봤더니 감독님이 너무 해맑게 ‘네’ 하시는 거예요. 남이 춤추는 걸 보는 게 좋으시대요(웃음). 춤을 배워보고 느낀 건 제가 소질도 없고 가무에 약하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계속 마인드컨트롤을 했죠. ‘난 정말 잘 춰!’ 하면서(웃음). 친구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막 웃을까봐 걱정이에요.”
어느 작품에서든 배두나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잡지 모델로 시작한 스무 살부터 마흔을 넘어선 지금까지 감독과 장르, 심지어 나라마저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면 ‘천상 배우’라는 말이 그렇게 완벽하게 맞아 떨어질 수 없다. “작은 찬사에 동요하지 말고, 큰 비난에 아파하지 말자”는 말이 스무 살부터의 좌우명이었다는 배두나는 이 마음가짐 자체가 이제는 생활 태도가 돼 버렸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때때로 슬럼프가 오기도 해요. 벽에 부딪치는 것 같고, 또 세상이 내 맘 같지 않구나 하는 마음은 매번 느끼죠. 그걸 이제는 그냥 수용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연기는 재미있어요. 제가 그 외에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기도 하고요. 배우로서의 삶이 점점 너무 커져서 연기자 외의 삶은 비율이 계속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인간 배두나는 그냥 계속 누워있거든요, 되게 게으르고(웃음). 20대 땐 안 그랬어요. 일상도 즐기고, 일도 즐기고 균형을 잘 맞춰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경력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일에 힘을 더 쏟게 되나 봐요. 다른 인생을 즐길 힘이 없어요, 이젠(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