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24일 방송되는 KBS '자연의 철학자들' 47회는 '지리산에 깃들다' 편으로 지리산의 품에 안겨 꿈꿨던 삶을 살아가는 강병규 씨의 철학을 들어본다.
덕두봉, 바래봉, 두리봉부터 반야봉, 제석봉, 천왕봉까지 지리산의 전체 능선이 한눈에 보이는 마당에 살고 있는 강병규 씨(59). 그의 하루하루는 매일 새롭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매번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지리산의 경이로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산의 등줄기에서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운무, 새하얀 눈꽃이 만발한 설산, 산을 붉게 물들이는 일출, 죽음에서 새 생명을 길어 올리는 고목 등 집에만 있어도 매일 지리산의 눈부신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 자연 속에서 문명의 시계가 아닌 자연이 만들어내는 시간에 따라 온몸으로 살아가는 나날들. 각박한 도시를 떠나 지리산에서 그가 꿈꿔왔던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라고 말이다.
그가 지리산으로 온 것은 18년 전 10여 년에 걸쳐 주말마다 지리산을 오르며 지리산과 수없는 대화를 한 뒤 내린 결정이었다. 젊은 날 그는 사업 실패의 좌절과 치열한 직장에서의 지친 마음을 비워내기 위해 홀로 30kg의 배낭을 메고 해발 1500~1900미터나 되는 지리산을 올랐다.
그리고 마흔 살을 넘긴 어느 날 계시처럼 '여기다. 내가 살 곳은 여기다. 여기에서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다. 그래야 죽을 때 후회라도 하지 않겠다'라는 격한 감정이 찾아왔다. 그가 직접 경험한 자연의 경이로운 힘 앞에서 그는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선명해지면서 새로운 소망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는 과감하게 다니던 안정된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지리산 정착을 선택했다.
너른 품으로 그를 안아주고 갈 길을 알려준 지리산. 그는 기꺼이 지리산다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제 손으로 흙을 만지고 땀을 흘려가며 지리산의 황토와 나무 껍데기로 너와집을 지었다. 지리산에 기대 사니 집도 어울리는 풍경이 되길 바랐다. 1만 5000여 평 야산의 잡목을 정리해 소나무 숲을 가꾸며 그 안에 구절초 밭을 조성했다.
구절초는 소나무의 산성을 견딜 만큼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구절초보다 강한 것이 잡초. 봄부터 초가을까지 쉼 없이 잡초를 정리해줘야 가을에 몽환적인 구절초 동산을 볼 수 있다. 그의 숲은 지리산의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빛내는 자랑거리 중 하나다. 이제야 그는 감히 말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은 공존할 수 있다'라고 말이다.
새로운 삶과 함께 새로운 행복도 얻었다. 지리산에서 태어난 늦둥이 딸 다현이(10). 그의 곁에서 시골살이에 즐거움을 더해준다. 딸 덕분에 웃을 일이 많다는 강병규 씨는 지리산에서 자라는 딸의 앞날에 걱정보다 자부심이 크다. 자연이라는 생태계를 이해하는 뿌리 깊은 사람이 사람들 간의 관계, 사람과 동식물 간의 관계가 자연 속에서 어떻게 융화되는지를 느끼며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현이는 아빠가 사준 카메라를 가지고 지리산 능선을 유심히 관찰하는 연습을 하고 아빠의 일을 도우며 씩씩함을 배운다. 마을 앞 개울의 수달을 관찰하며 자연과 교감하고, 인간과의 공존법을 체험한다. 밤에는 밤하늘의 별이 다현이를 상상력의 세계로 이끈다.
평생 맘 고생시켜드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신의 숲에 모신 것도 그에게는 소중한 행복이다. 이제야 장남의 역할을 다한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놓인다.
새로운 삶을 살기위해 지리산에 깃들었던 강병규 씨. 그의 노력에 기대 이상의 행복으로 보상해주는 지리산. 그래서 지리산이 늘 고맙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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