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위 ‘사찰왕’ 머리카락 보인다
▲ 지난 2일 파이시티 인허가 로비 의혹과 관련해 대검에 출석한 박영준 전 차관. 검찰은 민간인 불법사찰 개입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정국을 뒤흔드는 핵뇌관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이 사건을 재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최근 진경락 전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구속기소)이 갖고 있던 지원관실 문건을 추가로 확보하고 사실관계 파악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검찰은 진 전 과장의 여동생 집 등 관련자 주변 인물들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추가로 400여 건의 사찰문건을 확보했다.
이 문건에는 새누리당 정두언·현기환 의원, 민주통합당 이석현·백원우 의원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실명이 등장한다. 불법사찰 사건 1차 수사팀이 확보한 문건에 여야 의원(남경필 김유정)들이 등장하면서 소문만 무성했던 추가 정치인 사찰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이번에 드러난 정치인 사찰문건은 단순한 동향파악 수준을 넘어 ‘기획 사찰’ 내지는 ‘표적 사찰’ 의도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실제로 문건에 등장한 여야 의원들은 현 정권에 반기를 들거나 ‘반 이명박’ 노선을 견지해 온 정치인들이었고, 문건에 적시된 내용 또한 구체적이고 치밀한 사실상의 ‘지시’ 수준이었다.
2009년 1월 12에 작성된 ‘해야 할 일 12’라는 제하의 파일에는 ‘사하구청장 조정화, 현기환(초선·사하갑) 의원 대통령 비방. 친박 쪽으로 9일 상경. 국회의원은 현 의원을, 산하단체는 광주은행 감사(정두언과 친함)를 타깃으로’라고 적시돼 있다. 2009년 9월 16일과 10월 14일에 작성된 파일에는 ‘백원우·이석현 관련 후원회, 동향, 지원 그룹이 실체가 드러나도록 보고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386그룹 친노인사인 백원우 의원은 2009년 5월 고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살인자’라고 강도 높게 비난한 바 있고, 이석현 의원은 같은해 6월 이 대통령이 서울 이문동 떡볶이집을 방문하자 “이 대통령은 떡볶이집에 가지 마라. 손님이 안 온다”고 비꼬는 등 이 대통령과 현 정권에 대립각을 세워온 야당 정치인이다.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정두언 의원은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의 2선 후퇴를 주장하는 등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현기환 의원 역시 집권 초기 현 정권과 각을 세웠던 대표적인 여당 정치인이었다.
문건에는 이들 정치인들 외에 고위 공직자와 민간 기업인들도 등장해 불법사찰이 전 방위적으로 자행돼 왔음을 방증하고 있다. 강계두 전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 이사장과 관련된 문건에는 ‘호남과 고려대만 죽어라 챙긴다. 따라붙어서 잘라라’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적시돼 있다. 우제창 전 한국학술진흥재단 사무총장 관련 문건에는 ‘목포대 파가지고 확실히 정리 要(요)’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김태석 전 여성가족부 기획조정실장과 관련된 문건에는 ‘(현직에서) 날릴 수 있도록’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밖에도 지난 4·11 총선 때 당선된 박덕흠 전 대한전문건설협회장, 권 아무개 전 KT&G 사장, 케이블방송사인 CMB 이 아무개 대표 등도 문건에 등장한다. 이들은 각각 ‘노무현 정부 핵심 인사들에게 자금을 지원한 의혹’ ‘목포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 비호 아래 급성장’ 등의 설명과 함께 사찰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표적 사찰’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공직자 기강 확립을 목적으로 설치된 지원관실이 정상적인 업무범위와 감찰방식을 넘어 불법사찰을 수시로 자행한 정황 증거들이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단순한 추가 사찰을 넘어 ‘윗선’ 개입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거센 정치적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검찰은 그동안 수사 과정에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48·구속기소)이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의 ‘몸통’이라고 자처해 왔지만 여권 실세나 청와대 등 ‘윗선’이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를 진행해 왔다. 특히 검찰은 이번에 확보한 사찰문건에 등장한 여야 정치인들이 현 정권과 대립각을 세워온 공통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청와대나 여권 실세들이 불법사찰을 직접 지시했거나 최소한 교감 내지는 사찰 내용에 대해 보고를 받았을 가능성에 힘을 싣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이번에 공개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추진 지휘체계’(2008년 8월 28일 작성) 문건에는 ‘지원관실이 노무현 정권 인사들의 음성적 저항 등으로 VIP의 국정수행에 차질이 빚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설립됐다’고 명시돼 있다. 또 ‘VIP에게 일심(一心)으로 충성하는 친위조직이 비선에서 총괄지휘한다’고 적혀 있다. 특히 문건에는 ‘일반사항은 총리에게 보고하되 특명사항은 청와대 비선을 거쳐 VIP 또는 대통령실장에게 보고한다’는 내용도 적시돼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청와대 실세나 이 대통령에게까지 지원관실의 불법사찰 업무 결과가 보고된 정황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파문 확산을 예고하고 있다.
검찰은 또 다른 ‘윗선’ 개입 정황이 담긴 새로운 사찰문건을 확보한 만큼 수사팀을 대폭 보강하는 등 불법사찰 사건의 ‘윗선’ 내지는 ‘몸통’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이 5월 17일 파이시티 사건으로 구속된 박영준 전 차관을 불법사찰 사건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 조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박 전 차관은 지원관실 설립부터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1차 수사 당시에도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윗선’으로 지목돼 왔다. 지난 2010년 민간인 불법사찰 1차 수사 당시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으로 재직했던 박 전 차관은 지원관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훼손하는 등 증거인멸에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 불법사찰 ‘윗선’으로 거론되고 있는 임태희 전 비서실장(왼쪽)과 권재진 법무장관. 청와대사진기자단 |
따라서 검찰은 박 전 차관을 상대로 최근 확보한 문건에 등장하는 ‘BH 비선라인’의 실체와 역할을 포함해 그가 민간인 불법사찰 전반을 알고 있었는지, 불법사찰과 관련된 증거인멸에 개입했는지 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박 전 차관을 몇 차례 더 소환조사를 한 뒤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사법처리 수위를 결정할 방침이다.
검찰은 파이시티 사건으로 박 전 차관의 신변이 확보된 만큼 그에 대한 혐의 입증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박 전 차관의 사법처리는 시간 문제일 뿐이고 탄력 받은 검찰의 칼끝이 권력 심장부까지 겨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정치권에선 당시 청와대 보고라인 정점에 있었던 임태희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이었던 권재진 법무장관을 불법사찰 ‘윗선’으로 지목하고 있다. 나아가 야권과 시민단체는 이 대통령을 ‘몸통’으로 겨냥하고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통합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5월 17일 “민간인 사찰의 몸통은 이명박 대통령”이라며 “몸통인 이 대통령이 귀국하면 여기에 대한 응분의 책임, 그리고 말씀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 이석현 국기문란특위 위원장은 “민간사찰의 주범이 청와대였고, 공직윤리관실은 종범이었다”며 청와대를 조준했고, 이춘석 의원은 “민간인 사찰 부분과 검찰의 중립성,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민정수석이던 권재진 장관은 사퇴해야 할 것”이라며 권 장관의 사퇴를 압박하고 나섰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민간인불법사찰 비상행동’도 이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대통령이 직접 비선·친위조직의 실체와 민간인 불법사찰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밝혀야 한다”며 이 대통령을 압박했다.
새로운 사찰문건이 공개되면서 새 국면을 맞고 있는 불법사찰 사건이 이영호·박영준을 넘어 청와대 핵심 실세와 이 대통령에게까지 그 불똥이 튀고 있는 형국이다. 과연 1차 부실수사 수모를 불식시키고 명예회복을 노리는 검찰의 서슬퍼런 재수사 칼날이 살아있는 권력 심장부를 겨냥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