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사그라든 ‘의혹 불씨’ 다시 화르르
▲ 각종 의혹이 또다시 불거지면서 여론의 중심에 선 정준양 포스코 회장. 유장훈 기자 |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업황과 실적이 좋지 않아 올해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할 때나 지난 3년간 포스코가 진행해온 인수·합병(M&A) 성적표에 대해 비난을 받을 때와 차원이 다르다. 경영 능력과 관련한 일이라면 정 회장으로서는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권 실세들을 배경에 두고 세계 3대 철강기업 회장 자리에 앉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된다.
2009년 1월 포스코의 신임 회장 자리를 놓고 물망에 오른 사람은 당시 윤석만 포스코 사장(현 포스코건설 고문)과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이었다. 새 정권이 들어선 후 임기를 채우지도 못한 이구택 전 회장의 위치가 위태로워지자 차기 회장에 대한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당시 두 후보가 각축을 벌였다고는 하나 윤 사장이 차기 회장 자리에 더 근접해 있었다. 고 박태준 명예회장이 포스코의 서열 2위인 윤 사장을 차기 회장으로 점찍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급반전됐다. 정준양 사장이 차기 회장으로 유력해진 것. 윤 사장을 후임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구택 당시 회장도 갑자기 정준양 사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때 정권의 실세가 정 사장을 차기 회장으로 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영준 전 차관의 이름도 이때 이미 거론됐다. 당시 윤석만 사장은 이사회에 참석해 “회장 선임 과정에 권력이 개입돼 있다”며 “높은 곳에서 정준양 사장을 밀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지금 시점에서는 함부로 말하기 곤란하다”며 “2009년 이사회에서 말한 것으로 대신하겠다”고 밝혔다.
가뜩이나 이구택 전 회장의 임기가 남은 상태인 데다 이 전 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고 있던 터라 당시 ‘정준양 사장 회장 만들기’에 대한 의혹은 증폭되다 의혹으로만 남은 채 잊혀져갔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때 의혹이 되살아나고 있다.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다. 3년 전이 정권 초라면 지금은 임기 말 곳곳에서 레임덕 조짐이 보이는 시기다. 3년 전 정권 실세로서 박 전 차관의 입김이 막강했다면 지금은 비리 혐의로 구속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처지가 됐다. 의혹의 실체에 접근하게 될 확률이 어느 때보다 높다.
더욱이 지금은 정 회장 선임이 ‘대통령의 뜻’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3년 전에도 ‘청와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의혹이 일부에서 제기됐지만 구체성이 결여돼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대통령의 뜻’임을 알리는 증언과 정황이 하나씩 까발려지고 있다. 장정욱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 팀장은 “개연성 있는 의혹 수준이었던 것들이 차차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박영준 전 차관, 이동조 제이엔테크 회장 등 현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사들과 관계, 교류한 흔적 등이 밝혀지면서 정준양 회장은 최근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다. 공개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물론 현재 알려진 의혹에도 묵묵부답이다.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불참했고 여수 엑스포 개막식에도 불참했다.
▲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포스코센터 전경.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정준양 회장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소문이 여러 번 나돈 바 있다. 2009년 포스코 회장 자리를 다툴 때에도 자사주 매입 후 차익 실현 같은 개인 비리, 처남과 친동생 회사에 특혜를 주었다는 친인척 비리 의혹 등이 제기됐다.
포스코 내부 감사 결과 ‘사실무근’으로 결론이 났다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판이하다. 만일 정권 실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것이 사실이고 깨끗하지 못한 회장 선임 과정 역시 사실이라면 당시 포스코 감사실에도 정권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권 초기 청와대에서 밀고 있는 후보자에 대해 포스코 감사실이 딴죽을 걸 만큼 배짱을 부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 회장은 임기를 채우기 위해 버티던 이구택 전 회장을 끌어내리면서까지 회장 자리에 앉히려던 터였다.
정준양 회장의 친동생이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도 정준양 회장이 현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공산이 커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 회장의 동생이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다는 얘기를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지만 이름까지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동생이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다면 현 정권 인사들과 연결 통로를 마련하고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은 자명하다. 포스코 회장 비서실은 “회장 형제관계는 확인할 수 없다”면서도 “청와대 근무설은 금시초문”이라고 밝혔다.
2009년 이후에도 정 회장과 정권 실세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은 재계에서 적잖이 회자됐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박 전 차관이 한창 자원개발·외교를 펼칠 때 특정기업(포스코)에 몰아주고 있다는 비난이 많았다”며 “박 전 차관과 포스코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전했다.
지난 3월 16일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 이날 열린 포스코 주주총회에서 정준양 회장은 연임을 확정지었다. 비록 연임을 최종 확정한 것은 이날이지만 정준양 회장은 이미 지난 1월 포스코CEO후보추천위원회가 정 회장을 차기 포스코 회장의 단독후보로 추천함으로써 연임을 결정지은 셈이다.
정준양 회장 연임에 대해서 비관적인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회장으로 재임한 지난 3년간 경영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던 탓이다. 회장으로 취임한 첫해(2009년)와 비교해 지난해 영업이익률이 떨어졌고 부채비율은 높아졌다. 정준양 회장은 또 철강 위주에서 탈피해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겠다며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주도했다. 그 결과 2009년 36개였던 계열사가 2011년에는 61개로, 지난 4월 12일을 기준으로 해서는 70개로 대폭 늘어났다.
반면 M&A 이후 성적표는 초라하다. 인수한 업체 중 상당수의 수익성이 오히려 낮아졌다. M&A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포스코의 재무구조도 악화됐다. 오죽하면 정준양 회장을 두고 ‘마이너스 손’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을까.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국제신용평가사들은 재무구조를 우려하며 포스코의 신용등급을 잇따라 하향한 것도 모자라 재무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또 다시 하향할 것임을 경고했다.
이 때문에 포스코는 최대 7조 원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SK텔레콤·KB금융지주 등의 지분을 매각하고 포스코특수강 상장을 계획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결과는 아직 계획했던 자금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탓에 정준양 회장의 연임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 포스코 회장 자리가 정치권과 연결돼 왔다는 사실도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도 있었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지난해 말부터 정권이 바뀌면 포스코가 첫 번째 사정 대상 기업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며 “현 정권 측근 비리의 뇌관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정준양 회장은 노동자들에게도 불만의 대상이다. 특히 사내 하청업체의 경우 상황이 심각하다. 포스코 사내 하청업체들의 평균 임금은 포스코 정규직 임금의 40%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성과 배분과 휴일 등 복지 문제에서도 정규직과 비교해 크게 차별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내 하청직원들의 처우 개선이 추진되다 정준양 회장 취임 이후 ‘올스톱’된 것이 사내 하청업체들의 가장 큰 불만이다. 이구택 전 회장 시절 사내 하청직원들의 평균 임금을 정규직의 70%까지 끌어올리는 방안이 추진됐지만 정 회장으로 바뀌고 나서 이것이 중단됐다고 한다.
정준양 회장은 또 사내 하청업체와 재계약 시 평가 항목 중 노조활동 부분에 큰 점수를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평가서에 노조활동 부분을 암시하는 항목이 있다는 것 자체가 노조활동을 가로막겠다는 의도라는 것이 사내 하청업체 직원들의 얘기다. 양동운 전국금속노동조합 포스코사내하청지회장은 “노동자들 입장에서 정준양 회장의 가장 큰 문제는 이구택 전 회장이 약속했던 처우 개선을 되짚어볼 수 없게 한 점, 노조활동을 원천 봉쇄하고 탄압한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 문제가 됐던 친인척 비리 의혹이 최근 또 다시 흘러나오기도 한다. 포스코는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와 포스코ICT 판교 사옥에 ‘스마트오피스’를 구현했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스마트오피스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실질 공사를 정 회장의 친동생이 했다는 의혹이 일각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포스코 관계자는 “스마트오피스 개조 공사는 계열사인 포스코에이엔씨가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친인척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단언했다.
또 이구택 포스텍 이사장의 지시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진 학교법인 포스텍의 부산저축은행 투자가 실은 ‘정준양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정준양 회장과 이구택 이사장 모두 전면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재계에서는 500억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하는 데 회장이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분위기다. 앞서의 재계 고위 관계자는 “500억 원이나 투자하는데 회장이 몰랐다는 건 기업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더욱이 포스텍의 부산저축은행 500억 원 투자는 실무진에서 ‘부적격’ 의견을 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이사회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급박하고 은밀하게 진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스코 측은 “포스텍의 투자심의 절차를 준수해 자체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며 “CEO가 지시를 하거나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런저런 문제들 때문에 일각에서는 지난해부터 정준양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 회장은 단독후보로 연임에 성공했다. 연임한 지 불과 두 달 남짓, 기쁨도 잠시. 정준양 회장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포스코 측은 사실관계가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동요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정치권이나 검찰이나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 박영준 전 차관. 사진공동취재단 |
‘왕차관’ 캐다 보니, 어라!
지난 2009년 제기된 바 있는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포스코 인사 개입 의혹이 구체화된 것은 서울 양재동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와 관련, 그가 구속되면서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박 전 차관이 2008년 말부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이구택 포스코 회장, 윤석만 포스코 사장,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을 잇달아 만난 사실을 확인했다. 공교롭게도 포스코 신임 회장을 선임하는 시기에 관련 인사들과 접촉한 것이다.
포스코건설의 파이시티 사업권 수주 과정에서 박 전 차관의 ‘비자금 관리인’으로 의심되는 이동조 제이엔테크 회장도 검찰 수사선상에 오르면서 ‘박영준-이동조-정준양 커넥션’의 정황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박 전 차관을 비롯해 관련 인사들이 인사 개입에 대해 모두 부인하고 있지만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박 전 차관이 스스로 포스코 신임 회장 선임을 앞두고 포스코 핵심인사들을 만났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권 초 핵심 실세 중 한 명이 부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인사들을 만난 셈이다.
이석현 민주통합당 의원 등 정치권,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도 박 전 차관이 포스코 회장 선임에 입김을 불어넣은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비판했다. 더욱이 ‘대통령의 뜻’이라는 말까지 나오면서 과연 몸통이 누구인지에도 관심이 증폭됐다. 이와 함께 개인적인 비리 의혹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정준양 회장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 정 회장은 최근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입장 표명도 포스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