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김현수 대립하는 모양새 보여…황금세대들, 대표팀과 씁쓸한 작별도
'도쿄 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2006년 1회 대회 4강에 진출하고 2009년 2회 대회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돌풍을 일으킨 역사가 있다. 그러나 2013년과 2017년에 이어 올해까지 3회 연속 1라운드 문턱을 넘지 못 하면서 세계의 높은 벽과 냉정한 현실을 실감했다. 이번 대회도 다르지 않았다. 한 수 아래 상대인 호주에게 첫 판을 내주면서 이후 마운드 운영이 연쇄적으로 꼬였다. 컨디션 관리에 실패한 투수들은 마운드에서 스트라이크를 제대로 던지지 못했고, 결국 3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이라는 수모를 맛봐야 했다.
KBO는 16일 실행위원회를 마친 뒤 대국민 사과문을 내고 "야구대표팀이 2023 WBC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 하는 성적과 경기력을 보인 점에 대해 응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과 야구 팬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KBO와 10개 구단은 이번 WBC 결과에 큰 책임을 통감하며 여러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앞으로 리그 경기력과 국가대표팀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중장기적인 대책을 조속한 시일 내에 마련하겠다"고 했다.
#설전으로 번진 1라운드 탈락 여파
한국은 대진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승 후보 일본과 같은 조에 편성되긴 했지만, 다른 3개국은 비교적 약체에 속해 조 2위는 무난할 것으로 여겼다. 우승 후보 3개국(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공화국)이 한꺼번에 몰려 '죽음의 조'라 불리는 D조와는 대조적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8강에 오를 경우 맞붙게 될 A조 국가들도 어느 팀이 올라오든 충분히 대결해 볼 만한 상대였다. 개막 전 대표팀이 내심 4강까지 기대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한국 야구가 1라운드에서 조기 퇴장하자 후폭풍이 거셌다. 아마추어 야구의 나무 배트 사용, 미흡한 야구 인프라, 얇은 선수층, 세대교체 실패, 부풀려진 몸값 등 한국이 국제대회에서 부진한 성적을 낼 때마다 단골로 지적돼 온 문제점이 차례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 대회에선 유독 야구인들 사이에 날선 설전이 벌어져 여러 뒷말을 낳았다. 참패 직후 나온 선배의 거침 없는 지적에 대표팀 주장이 공개적으로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대립각이 첨예해졌다.
먼저 공을 던진 건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출신인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었다. 양 위원은 지난 10일 한국이 한일전에서 대패하자 자신의 유튜브 생방송을 통해 대표팀을 비판했다. "너무 속이 상한다. '대한민국 야구가 이거밖에 안 되나'하는 자괴감도 든다"며 "내가 본 최악의 경기다. 지금까지 국제대회를 하면 그래도 한국은 경쟁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한일전은) 내가 본 최고의 졸전"이라고 혹평했다. 이강철 대표팀 감독을 향해 "악수를 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양 위원은 "감독은 책임지는 자리다.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경기 운영을 하면 국대 감독은 안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냥 KT 위즈만 지휘하시는 게 낫다"고도 했다. 같은 야구인이자 현역 야구 해설위원의 평가라고 하기에는 발언의 수위가 높고 단어 선택이 직설적이었다.
양 위원은 또 과거 학교폭력으로 징계를 받아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한 안우진(키움 히어로즈)을 언급하면서 "꼭 필요한 선수인데 너무 아쉽다. 기회를 줘야 했다. 한국야구가 정신 차릴 때가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중국한테 지면 (한국에) 들어오지 마라. 그냥 일본에서 사회인 야구나 뛰고, 국가대표도 때려치워야 한다"고 선수단을 비난했다. 댓글창을 보고는 "배는 타고 와야 한다. 오리배"라는 조롱 섞인 발언도 했다.
그 후 사흘 뒤, 중국전을 콜드게임승으로 마치고 대회를 마무리한 주장 김현수(LG 트윈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과거 대표팀에 나오셨던 선배들에게 위로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분들이 (국가대표를)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며 "그런 부분이 아쉽다. 우리랑 같은 야구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아쉬운 것 같다"고 했다. 화살의 방향을 분명히 밝히진 않았지만, 양준혁 위원을 향한 서운함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박재홍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자신의 유튜브를 통해 '중재자'를 자처했다. 박 위원은 "준혁이 형이 '오리배 타고 와라', '헤엄쳐서 와라' 등 워딩을 세게 한 면이 있다. 김현수도 그 말에 받아쳤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준혁이 형이 화가 나서 말은 했지만 마음은 아팠을 것이다. 김현수 역시 만감이 교차했을 거다. 대표팀 주장이면 코치들과의 가교 역할도 해야 하고 후배도 챙겨야 하니, 자신이 방어막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양쪽의 입장 차를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박 위원은 "준혁이형 같은 사람도 야구계에 한두 명은 있어야 한다"며 "형이 예전에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을 만들 때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선수협을 만든 선배들 덕에 선수들이 지금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 히스토리를 잘 설명하지 못한 부분은 선배들 잘못인 것 같다. 씁쓸하다"고 애써 양 위원을 감쌌다.
#김현수와 김광현의 은퇴
야구계를 다시 한 번 뒤흔든 WBC 1라운드 탈락의 여파 속에 한국 야구의 국제대회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금 세대'들은 태극마크에 쓸쓸한 작별을 고해야 했다. 김현수는 대회를 마친 직후 "많은 분들이 경기장에서 응원을 해주셨다. 우리가 못한 것에 실망도 하셨겠지만, 야구장에 와 주셔서 감사하다"며 "내가 '코리아' 유니폼을 입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제 나이도 들었고, 젊은 선수들이 더 잘할 거라 생각한다. (국가대표에서) 내려올 때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그는 사실상의 국가대표 은퇴 선언을 한 뒤 감정이 복받치는지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다.
김현수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시작으로 15년간 한국 야구대표팀의 간판 타자로 활약했다. 이번 WBC가 벌써 10번째(올림픽 2회, 아시안게임 3회, 프리미어12 2회, WBC 3회) 국제대회다. 이 대회에서 한국 국가대표 역대 최다 경기 출전 기록을 63경기로 늘렸다. 김현수는 "선수들이 다 준비를 잘했는데, 그만큼 실력 발휘를 하지 못 해서 아쉽다"며 "내가 주장으로 부족한 탓에 선수단을 잘 이끌지 못 해 좋은 성적을 못 냈다. 후배들은 최선을 다해줘서 고맙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김현수와 함께 15년간 한국 야구대표팀 에이스로 활약해 온 김광현(SSG 랜더스)도 뒤 이어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WBC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지난 1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지금까지 국가대표 김광현을 응원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김광현은 "내게 국가대표란 꿈이었고 자부심이었다"며 "2005년 청소년 대표부터 이번 2023년 WBC까지 나라를 위해, 대한민국 야구를 위해 뛴 나에게 자부심을 느낀다. 대표팀에서 많이 성장했고 많이 배웠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경기에 나섰을 때의 심정,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를 제창하던 모습은 평생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이라고 돌이켰다.
2008년 3월 베이징올림픽 최종 예선에서 처음 성인 대표팀에 뽑힌 김광현은 그해 8월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에서 일본을 상대로 8이닝 2실점(1자책점)으로 호투해 '일본 킬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2009년 WBC,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2015년 프리미어12, 2019년 프리미어12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했다. 김광현이 출전한 대회에서 한국은 모두 결승까지 진출했다. 올해 WBC가 유일한 예외다.
김광현은 이번 대회에서도 일본전 선발로 나서 3이닝을 던졌다. 한국 국가대표 투수 역대 최다 이닝 기록(59⅔이닝)을 남기고 태극마크를 영구 반납했다. 그는 "성적이 좋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고, 그걸 계기로 삼아 더 강해질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이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이제는 후배들에게 넘겨줘야 할 것 같다"며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너무나 아쉽고 분통하다"고 아쉬워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