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단 대다수가 외판원·교사 등 ‘투잡러’…1승밖에 못 올렸지만 진정한 승자로 여겨져
체코는 지난 13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대회 1라운드 B조 호주와의 최종전에서 3-8로 졌다. 조별 라운드를 1승 3패로 마치면서 8강에 오르지 못 하고 대회를 마감했다. 그런데도 올해 WBC 1라운드에서 그 어느 팀보다 많은 박수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마지막 경기에서도 많은 이가 잊지 못 할 명장면을 선사했다.
체코의 에이스 마르틴 슈나이더는 원래 직업이 소방관이다. 집 뒷마당에 그물망을 설치해 놓고 퇴근 후 틈틈이 투구 연습을 했다. 그런 그가 체코의 명운이 걸린 호주전에 등판해 '인생투'를 펼쳤다. 5와 3분의 1이닝을 홀로 책임지면서 안타 하나와 볼넷 한 개만 내줬다. 1회 알렉스 홀에게 맞은 선제 솔로홈런이 유일한 실점이었다.
6회 초 1사 후, 슈나이더가 투구 수 제한(65개)에 걸려 더는 공을 던질 수 없게 되자 파벨 하딤 체코 대표팀 감독이 마운드로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그리고 투수 교체를 기다리던 슈나이더 앞에서 모자를 벗고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체코 야구 역사의 새 장을 연 에이스에게 감독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경의 표시였다. 도쿄돔의 관중도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슈나이더를 기립 박수로 맞이했다.
슈나이더뿐 아니라 체코 대표팀 선수 대부분은 '본업'이 따로 있다. 외판원, 애널리스트, 고등학교 지리 교사, 부동산 중개인 등 직군도 다양하다. 한국전에 선발 등판한 루카스 에르콜리는 체코야구협회 홍보팀 직원이고, 일본전 선발 투수 온드르제이 사토리아는 전기 기사다. 하딤 감독조차 신경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체코 대표팀에서 프로야구 경험이 있는 선수는 메이저리그(MLB)에서 11년간 뛴 2번 타자 에릭 소가다뿐이다.
WBC 본선 무대를 밟은 것도 이번 대회가 처음이다. 지역 예선에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을 제치고 어렵게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그런데도 지난 10일 중국전에서 8-5로 이겨 역사적인 WBC 첫 승리를 신고했다. 열정 하나만으로 여가 시간을 쪼개 야구를 해온 '투잡러'들이 휴가를 내고 출전한 WBC에서 새로운 기적을 일궜다.
우승 후보로 꼽히는 일본과의 맞대결에서도 그랬다. 체코 대표팀은 일본에 도착한 뒤 "같은 B조에서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와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며 기뻐했다. 유니폼에 오타니의 사인을 받고 기뻐하며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경험'이 아닌 '승부'를 위해 WBC에 왔다는 점은 분명히 했다. 체코 선발 사토리아는 시속 130㎞도 안되는 느린 공으로 MLB 수퍼 스타 오타니를 상대하면서도 주눅들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공을 던지다 오타니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비로소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체코 더그아웃의 선수들은 그런 사토리아를 향해 축하의 휘파람을 불었다.
오타니 역시 체코의 열정을 눈여겨 봤다. 체코전이 일본의 대승으로 끝난 뒤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체코 선수단의 사진 한 장을 올렸다. 패하고도 일본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그들의 모습 위에 '리스펙트(Respect)'라고 적어 감동을 표현했다. 오타니의 '특별 언급' 소식에 체코 선수단이 "이게 무슨 일이냐"며 다시 한 번 기뻐한 것은 물론이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 투수 중 하나인 사사키 로키(지바 롯데)도 행동으로 '존중'을 보여줬다. 시속 160㎞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던지는 그는 체코전에서 윌리엄 에스칼라의 무릎에 맞는 공을 던진 뒤 어쩔 줄 몰라 했다. 별다른 부상은 없었지만, 사사키는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며 과자 보따리를 들고 체코 선수단 숙소를 찾았다. 하딤 감독은 "사사키의 팬이 됐다"며 오히려 감동했다.
체코는 마지막 호주전에서 7회 2점, 8회 3점을 내주면서 승부를 뒤집더라도 8강에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8회 말 2점을 보태 호주를 따라붙었고, 9회 말 1사 만루 기회를 만들며 마지막 순간까지 위협했다. 최선을 다한 승부로 상대를 존중했고, 패배 후에는 아낌 없는 박수를 쳤다. 1승밖에 올리지 못한 '아마추어 팀' 체코가 이번 WBC의 진정한 승자로 여겨지는 이유다.
하딤 감독은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 뒤 "(다음 WBC가 열리는) 3년 뒤에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고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세계적인 회계·컨설팅 기업인 KPMG에서 회계감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내야수 필립 스몰라는 "귀국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일해야 한다"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KPMG의 동료들은 스몰라가 WBC에서 돌아와 처음 출근하는 날, 대대적인 환영 파티를 준비했다는 후문이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