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악역 ‘최고의 악녀’ 만나 놓칠 수 없었죠…억울해하며 썩어갈 연진, 마지막에 무너질 땐 많이 울어”
※이 기사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배우 임지연(33)이 정의한 박연진은 ‘최고의 악녀’였다. 임지연은 물론이고 시청자에게도 최고의 악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배우 본인의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열연 덕이 아니었을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를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됐다는 임지연은 처음 박연진을 만나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대본을 읽을 때부터 연진이는 ‘최고의 악녀’라고 느껴졌어요. 이왕 하는 것, 처음 하는 악역인데 이렇게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났으면 당연히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죠. 처음엔 연진이란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갖가지 생각을 다 했던 것 같아요. 아예 소시오패스처럼, 로봇처럼 해볼까? 이미 대사가 센 캐릭터니까 담담하면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감정을 죄다 표출해볼까? 고민이 많았는데 그러다 결국 찾아낸 건 ‘그냥 나 자체로 가자’였어요. 분명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최고의 빌런’ 느낌은 나로부터 출발해야 매력적일 거야. 그 사실을 정말 우연히 찾아내게 된 거죠.”
배우의 말마따나 연진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완벽한 악녀로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분)을 몰아세운다. 학창시절에는 지독한 학교폭력(학폭) 가해자였던 그가 성장하고 나서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박연진을 최후의 최후까지 미워하게 된다. 임지연은 시청자들의 이 같은 반응이야말로 자신이 처음부터 바라왔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작품을 하며 사람들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고 주인공으로 공감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하는 것도 쉽지 않죠(웃음). 그게 제게 있어선 또 다른 도전이었기에 보시는 분들이 다 저를 미워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저 역시 연진이로서 연기했지만 단 한 순간도 (연진이를) 용납할 수 없었거든요. 작가님께도 말씀드렸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날 미워했으면 좋겠어요’라고요. 드라마가 공개되고 나서 다들 그렇게 봐주셨다면, 제가 성공한 것 같습니다(웃음).”
지옥으로 떨어지는 결말에 이르러서도 결코 반성하지 않는 박연진의 ‘악함’은 천성일까, 아니면 그렇게 만들어진 걸까. 이 질문 역시 처음 ‘더 글로리’를 시작한 임지연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연진의 악함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고.
“굳이 이유를 찾지 않으려고 했어요. 환경적 요인이나 트라우마로 인해서 변한 것일까, 아니면 선천적으로 죄책감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결국 이 인물은 그냥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죠.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었던 건 다 가졌고, 마인드 자체가 ‘난 이렇게 태어났는데 넌 누가 그렇게 태어나래?’ 이런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 ‘난 잘못한 게 없어, 동은아’ 라는 대사가 쉬워졌어요. 동은이를 괴롭힌 학폭 가해자 5명도 모두 똑같은 마음가짐이었을 거예요. 잘못을 모르니 온갖 악행을 저지르죠. 그래서 나쁜 애들의 케미스트리가 잘 살았던 것 같아요(웃음).”
그런 연진을 연기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을 물었을 땐 예상대로 “악 지르는 연기”가 세 손가락 안에 꼽혔다. 이유 없이 악한 성품을 지녀 자신의 악행은 모두 당연하다고 여기기에 연진은 평상시엔 늘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다. 그러나 갑작스런 분노를 참지 못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거나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는 신이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난다. 이런 신을 촬영한 뒤에 집에 돌아가면 늘 목이 잠겨 있었다는 게 임지연의 이야기다.
“파트2 후반부에 시체 안치실에서 신 서장에게 ‘됐고요!’라고 크게 소리 지르는 장면은 정말 완벽하게 준비하고 들어간 신이었어요. 처음 감독님이 와이드샷을 먼저 찍은 뒤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진짜 무섭다’ 하시면서(웃음).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정말 엄청난 칭찬이거든요. 연진이를 연기하다 보면 목소리 관리가 너무 힘들어서 무조건 원 테이크로 촬영을 마쳐야 했어요. 여러 번 같은 신을 촬영하면 목소리가 갈라져서(웃음).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저는 알 수 있어요. 저 장면에서 내가 목이 갈라졌는지 아닌지(웃음). 그런 부분은 후시 녹음으로 덮어주셨던 것 같아요.”
오랜 시간 고민하고 만들어낸 캐릭터였기 때문인지 연진의 최후는 임지연에게 여전히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촬영이 들어가기 전부터 몇 달 동안 마지막 장면을 고민해 왔다는 그는 결국 그 신을 “연진이가 받을 수 있는 최후이자 최고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야말로 ‘연진스러운’ 벌이었기에 연기한 배우의 입장으로서도, 시청자의 입장으로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결말이었다.
“연진이는 끝까지 잘못을 몰라요. 뉘우치지도 않고, 반성도 하지 않죠. 대신 자기가 저지른 악행을 그대로 되돌려 받으며 평생을 억울해하면서도 그 안에서 썩어가는 게 연진스러운 최고의 벌이라고 생각했어요. 찍을 때는 물론 너무 힘들었죠. 울기도 많이 울었고, 또 많이 무너졌어요. 제가 배우로서 연진이라는 캐릭터로 살아온 애정이 있었는데 항상 화려했던 연진이가 마지막에 무너지는 게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늘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아래를 향하고 있었던 애가 처음으로 위를 보게 되는 그 모습은 저도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2022년 12월 첫 공개 후 3개월 내내 뜨거운 이슈로 국내외를 달궜던 ‘더 글로리’ 속 배우들의 공통점은 이 열기에 그대로 들떠버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파트2 공개 첫 주엔 넷플릭스 TV쇼 부문 월드와이드 1위 자리까지 꿰차며 흥행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충분히 신나고 설렐 법한데도 쏟아지는 관심을 침착하게 넘어서 벌써부터 다음 작품 준비에 한창이다. 이는 임지연도 마찬가지였다. 박연진을 연기하면서 “내가 정말 ‘깡다구’가 센 배우라는 것을 알았다”며 웃음을 터뜨린 임지연은 그 ‘깡다구’를 바탕으로 박연진을 넘어선 새 얼굴에 충분히 이 열기를 엮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악역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내가 진짜 선하게 생겼나보다’ 생각했는데 연진이 캐릭터에 대해 작가님이 ‘천사 같은 얼굴에 악마의 심장이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신 걸 봤어요. 그렇다면 천사 같은 내 얼굴을 활용해 볼까? 그 마음에 도전했죠(웃음). 다음 작품에선 꼭 연진이 이상을 해내야 해’하는 부담은 없어요. 그저 더 좋은 작품, 새로운 배역을 만날 생각에 설레기만 하고 있거든요. 내 얼굴로는 상상이 안 되지만 그래도 한 번 캐릭터를 만들어 볼까라는 요상한 호기심이 생기는 작품을 계속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만의 한계점을 두지 않고 도전하는 게 배우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재미라고 생각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