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요청 거절 어렵지만 기술 유출 우려…용인 300조 투자 놓고 미국 대한 항변 해석 나와
삼성전자는 2021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약 22조 2275억 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 이는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중 역대 최대 규모로, 현재 공장 건설이 진행 중이다. 이후 삼성전자의 미국 추가 투자설도 나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7월 “삼성전자가 향후 20년 동안 텍사스에 2000억 달러(약 260조 원)를 투자해 11개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삼성전자는 당시 “구체적인 계획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 몇 년간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업체에 미국 투자를 요청해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위해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와 경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앞서 2021년 4월 백악관에서 글로벌 반도체 업체 관계자들과 회의를 가진 바 있다. 국내 기업으로는 삼성전자가 유일하게 해당 회의에 참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당시 “회의를 가진 이유는 어떻게 미국 내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고, 공급망을 보장할 것인지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며 “기업들이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경쟁력이 달려있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바이든 대통령의 요청을 대놓고 외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장 삼성전자의 지난해 매출 302조 2314억 원 중에서 39.37%인 118조 9746억 원이 미주에서 발생했다.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 삼성전자의 실적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미중 갈등을 피할 수 없다면 미국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미국 공급망에서 확실한 축을 맡는 것이 낫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반도체 업체에 대한 미국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최근 반도체지원법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짓는 기업들에게 보조금 총 390억 달러(약 51조 원)를 지원한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한 가이드라인에는 1억 5000만 달러(약 1960억 원) 이상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예상 사업이익을 초과할 경우 해당 초과 수익을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미국 정부에 재무계획서 등을 제출해야 하고, 미국 안보기관의 요청이 있으면 반도체 생산시설에 대한 접근권을 제공해야 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술이 미국에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뿐만 아니다. 미국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향후 10년 동안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능력을 5% 이상(보급형 반도체는 10% 이상) 늘리지 못한다. 사실상 중국 투자 금지로 해석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삼성전자가 미국의 보조금을 수령하지 않으면 중국 투자 제한 등 미국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 경우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야권에서는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SNS(소셜미디어)를 통해 “대중국 수출 감소로 무역 적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이 반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을 포기하면 수출경제에 힘든 고난이 닥쳐올 것”이라며 “미국 정부와 의회를 설득해 우리 기업이 일방적 희생을 당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지난 3월 13일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과 관련해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국익을 최대한 우선시하는 방향에서 협상하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업계에서는 한국 정부의 바이든 대통령 설득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라민 툴루이 미국 국무부 경제기업 담당 차관보는 지난 3월 15일(현지시간) “반도체법 보조금은 미국의 기업과 외국 기업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말했다. 사실상 반도체 지원법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것이다.
미국의 요구를 따르면 삼성전자의 중국 투자가 제한된다. 중국 정부가 삼성전자에 각종 불이익을 줄 수 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 중국도 미국 못지않게 중요한 시장이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중국 시장 매출은 35조 6258억 원으로 전체 매출의 11.79%를 차지한다. 삼성전자는 현재 중국 시안시와 쑤저우시에서 각각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시안 공장은 삼성전자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40% 이상을 담당한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는 지난 3월 15일 용인시 반도체 클러스터에 향후 20년 동안 30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미국이 아닌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것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반도체업계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더 이상 미국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신호로도 풀이한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이번 투자에 대해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위험을 회피한 최선의 부지 선택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이미 삼성전자가 미국에 핵심 설비를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가 적당한 선에서 삼성전자와 타협을 볼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도 있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경쟁사와의 공정 격차가 중요한 반도체 산업에 있어 정보 공개는 치명적일 수 있다”며 “정보 공개의 우려와 초과이익 반납 가능성 등을 고려했을 때 (미국에서) 고수익성 제품의 생산은 기피할 가능성이 높다 판단된다”고 내다봤다.
해외에서도 삼성전자의 용인시 투자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지난 3월 15일(현지시간) “미국이 자국 내 투자한 반도체 업체에게 수십억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의 보조금 정책을 발표하는 등 각국이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는 와중에 삼성전자의 용인시 투자가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삼성전자의 용인시 투자가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정책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이와 관련한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으로서는 무력감을 느끼더라도 주어진 조건을 따를 수밖에 없다”면서도 “삼성전자의 용인시 투자 관련해서는 삼성전자의 선택지가 미국밖에 없지는 않다고 항변하는 느낌”이라고 분석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