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투자 진행, 컨트롤타워 신설 전망…실적 회복과 사법 리스크 해소는 숙제
#입사 31년 만에 회장 승진
이재용 회장은 1991년 삼성전자 부장으로 입사하면서 일찌감치 삼성그룹의 차기 총수로 거론돼 왔다. 이 회장은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일한 아들로 사실상 경쟁자가 없었다. 이 회장은 2000년대 들어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렸다. 이 회장은 2001년 삼성전자 상무보로 승진한 데 이어 2003년 상무로 취임했고, 2007년 전무에 올랐다. 이어 2010년 1월 부사장으로 승진한 후 2010년 12월 사장 자리에 올랐고, 2012년에는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이재용 회장이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회장 승진도 조만간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회장 승진은 이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면서 이 회장이 경영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생존 중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은 2017년 8월 삼성의 뇌물 공여 혐의 관련 공판에서 “이재용 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받으라고 여러 번 채근했었다”고 증언했다. 이 회장은 이날 “이건희 회장이 와병 중이고, 의식이 없지만 생존해 계시니 (회장 승진은) 아들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재용 회장의 회장 승진설은 올해 들어 힘을 얻었다. 우선 2014년 쓰러진 뒤 병상에 있던 이건희 회장이 2020년 10월 별세하면서 회장 명분이 생겼다. 재계에서는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 등을 위해서는 강력한 오너 리더십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이 회장의 승진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꾸준히 나왔다. 실제 이건희 회장 와병 속 이재용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삼성그룹은 바이오 사업에 꾸준히 투자했고, 2017년에는 미국 전장 기업 하만을 약 9조 원에 인수했다. 그 결과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올해 상반기 매출 1조 1627억 원을 기록하는 등 삼성그룹 핵심 계열사로 자리 잡았다. 하만 역시 올해 상반기 매출 2조 9828억 원을 거뒀다. 하지만 이 회장이 2017년 구속되는 등 사법 리스크에 휩싸인 이후로는 삼성그룹의 이렇다 할 대규모 투자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5대그룹(삼성·SK·현대차·LG·롯데) 중 부회장 직함을 달고 있는 총수도 이재용 회장뿐이었다. 그렇다고 삼성그룹을 이끄는 전문경영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회장을 제외하고 삼성그룹 내 회장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은 김기남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이 유일하다. 그러나 삼성종합기술원은 그룹 경영보다는 삼성전자의 기술을 연구하는 곳으로 사실상 명예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재용 회장이 지난 8월 특별사면 대상자에 포함된 후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승진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이 회장은 특별사면 이전까지 가석방 신분이었으므로 삼성전자 취업이 불가능했다. 이 회장은 가석방 후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기공식에 참석한 데 이어 삼성엔지니어링, 삼성SDS, 삼성생명 등 계열사를 연이어 방문하면서 존재감을 보였다. 삼성 사장단도 지난 9월 일제히 삼성 인재개발원에 모여 회의를 가지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재용 회장의 승진설이 흘러나왔다. 이 회장이 활발한 해외 활동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회장은 지난 9월 멕시코, 파나마, 영국 등의 국가를 방문했고, 최근에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나 전략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10월 25일 “이재용 부회장이 조만간 회장으로 승진할 전망”이라며 “오는 11월 회장에 승진해 한국 최대 기업의 최고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당사자인 삼성은 그간 이재용 회장의 승진과 관련한 대외적인 언급을 자제해왔다. 이 회장은 지난 9월 영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할 당시 회장 승진과 관련한 질문에 “회사가 잘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답했다. 지난 10월 25일 이건희 회장 2주기 추모식에서도 회사 경영과 관련한 메시지는 나오지 않았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사회 등 공식 절차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삼성이 공식적으로 회장 승진설을 언급하면 여러 뒷말이 무성할 수밖에 없다”며 “확정 전까지는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어떠한 언급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재용 회장과 삼성전자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의 승진을 계기로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가 진행될 것이라 전망한다. 이 회장은 지난 27일 사내 게시판을 통해 “더 과감하고 도전적으로 나서야할 때”라며 “성별과 국적을 불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를 모셔오고, 양성해야 하며 세상에 없는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10월 27일 3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2022년 1년 동안 54조 원의 시설투자를 예상한다고 밝혔다. 올해 1~3분기 누적 시설투자액이 33조 원이므로 4분기에만 21조 원을 투자한다는 것이다. 부문별 투자계획을 살펴보면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평택캠퍼스 3·4기 라인 인프라와 EUV(극자외선) 등 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투자가 진행될 전망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는 생산 능력 확대를 중심으로 투자가 집행될 예정이고, SDC(디스플레이)는 중소형 플렉시블 생산 능력 확대와 대형 QD-OLED 생산 효율성 제고에 투자가 집중될 계획이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의 실적 회복이라는 숙제도 안고 있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3분기 15조 8175억 원에서 올해 3분기 10조 8520억 원으로 31.39% 줄었다. 김광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시장 수요가 예상보다 더욱 강하게 위축되고 있다”며 “삼성전자의 실적 감익은 2023년 2분기까지 지속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전했다.
삼성전자는 이와 관련해 중기 계획과 연계한 공급 운영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선 DS(반도체)는 고부가 제품 수요 대응과 첨단 공정·신규 응용처 확대를 추진할 예정이다. DX(모바일·TV·가전)는 라인업을 지속 강화하면서 스마트싱스(SmartThings)를 기반으로 한 멀티 디바이스를 지속적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이 밖에 파운드리는 고성능 컴퓨팅, 차량용 반도체 등에서 신규 수주를 확대할 계획이다. SDC는 중소형의 경우 IT·게임 등 신규 응용처 판매 확대에 주력할 예정이고, 대형은 제품 라인업 확대를 비롯해 성능 개선을 통한 QD-OLED 판매 확대와 수익성 개선을 추진할 계획이다.
삼성 외부적으로는 이재용 회장과 정치권과의 관계 설정에 이목이 집중된다. 대통령실은 지난 9월 이재용 회장을 ‘2030 부산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지원을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특사)로 임명했다. 이 회장이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에게 부산 엑스포 지지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이 엑스포 외에도 국가적 행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한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9월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은) 지금도 대한민국 경제의 중요한 플레이어지만 좀 더 국제적으로 기여하는 건설적인 플레이어가 됐으면 좋겠다”며 “중요한 기업인 만큼 이에 맞게 중요한 책임과 역할을 잘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삼성그룹 컨트롤타워 신설하나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의 승진과 동시에 삼성그룹 컨트롤타워 부활을 예상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2010년 12월 신사업 발굴 및 계열사 간 사업 전략 조정·지원 등을 담당하는 컨트롤타워 ‘미래전략실’을 신설했다. 그러나 미래전략실은 2016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기금 출연 및 정유라 씨의 승마 지원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비판 여론에 휩싸였다. 여론을 의식한 삼성그룹은 2017년 미래전략실을 해체했고, 현재까지도 별도의 컨트롤타워는 없는 상태다.
삼성그룹은 현재 사업 부문별로 사업지원, 금융경쟁력제고, EPC(설계·조달·시공), 세 개의 태스크포스(TF)를 운영 중이다. 각 TF는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이 주도하고 있으며 계열사 간 협력 및 시너지를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재계 일각에서는 M&A 등 대규모 투자결정을 위해서는 총수 주도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중장기 성장 전략 마련에도 그룹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가 필수적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아직까지 컨트롤타워 신설과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은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컨트롤타워가 신설될 것이라는 전망은 꾸준히 흘러나온다. 삼성전자는 이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지속가능경영과 관련한 컨설팅을 의뢰했고, BCG는 그룹 차원의 ‘컨트롤타워 복원’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컨트롤타워가 부활하면 삼성그룹의 2인자도 자연스럽게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미래전략실을 이끌었던 최지성 전 실장이나 전략기획실을 이끌었던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은 명실상부 삼성그룹의 2인자로 꼽혔다. 전략기획실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존재했던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다.
재계에서는 컨트롤타워를 이끌 인물로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장(부회장)을 주목한다. 정 부회장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등을 두루 거치는 등 삼성그룹 핵심 부서에서 근무해왔다. 정 부회장은 이재용 회장과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동문이기도 하다. 삼성전자 DX 부문을 이끌고 있는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도 컨트롤타워를 이끌 후보로 거론된다.
'이재용 회장 시대'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 승진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삼성그룹의 최고경영자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만큼 이재용 부회장의 회장 승진은 경영 안전성을 높이는 결정”이라며 “대외 경영 여건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위기 대응을 위한 책임경영을 강화하고, 한국 경제의 리딩 컴퍼니로서 미래전략을 수립하는 데 과감한 의사결정과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업본부장도 “이재용 회장의 승진을 계기로 삼성전자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우리 앞에 놓인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재용 회장의 승진이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의혹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관련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재용 회장은 매주 목요일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의혹 관련 재판에 출석하고 있고, 삼성바이오로직스 관련 재판은 3주에 한 번 출석하고 있다. 장기간 해외 출장 등에 제약이 생길 수 있고, 만에 하나 유죄를 선고 받으면 경영 불확실성은 커지게 된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와 노동계에서는 이재용 회장 승진을 반대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논평을 통해 “이재용 회장이 재판 중인 상황에서 책임 경영과 경영 안정성을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의 극치”라며 “삼성그룹 전체의 경영 리스크를 가중시킨 무책임한 삼성전자 이사회의 결정을 규탄하며 이재용 회장이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역시 “단죄 받지 않은 재벌 총수의 경제범죄를 용서한 적이 없으며 재벌 3세 세습경영을 꾀한 삼성전자를 규탄한다”며 “재벌 개혁 없이, 재벌 체제 청산 없이는 불평등과 양극화 완화도, 빈곤 철폐도, 한국경제의 균형 있는 미래도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