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순처럼 폭풍 같은 인생 사는 캐릭터 언제 또 만날지 몰라”…촬영 내내 퉁퉁 부은 눈으로 연기
“저는 그냥 ‘곱게 갈게요’ 이 생각뿐이었어요(웃음). 저로서는 영순이가 너무나도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됐다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죽는다는 것 자체가 슬프거나 마음 아프게 다가오지 않았기에 너무 잘 짜인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 그 결말이 아니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찝찝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웃음). 영순이에게 돼지 엉덩이에 도장을 찍어주듯이 ‘참 잘했어요’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참 잘 살았어요’라고요.”
‘나쁜 엄마’에서 라미란은 세상 천지에 오직 단 한 명 남은 혈육, 아들 강호(이도현 분)만을 위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엄마이자 행복한 돼지농장 사장 진영순을 연기했다. 영순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남동생을 교통사고로 잃고 남편과 겨우 찾은 행복을 이어가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농장을 노린 이들로 인해 남편마저 잃은 기구한 인물이다.
유일한 혈육 강호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맡기려 하지만 아들 역시 권력 싸움에 희생돼 전신마비와 일곱 살 수준의 정신장애를 갖게 됐다. 아들까지 잃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아등바등 살아가려던 중 자신마저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게 되는, 보통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도 한 번 겪기 힘든 풍파를 인생 전반에 걸쳐 모조리 받아내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사다난하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이런 인생을 사는 역할을 맡는 게 쉽지 않잖아요. 이런 작품을 또 언제 해보겠어요(웃음). 제가 나이가 있다 보니 앞으로도 엄마나 좀 더 나가서 할머니 역을 하게 될 텐데, 그러다 보면 어떤 액세서리처럼 이야기의 주변으로 빠져 있을 확률이 높아요. 그런데 영순처럼, 이렇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역할은 너무나 매력 있는 거죠. 그런 데다 재미있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작품이라니. 이런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니 들어왔을 때 ‘감사합니다’ 하고 해야 하는 거죠(웃음).”
남편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은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영순은 하나뿐인 아들 강호만큼은 그런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채찍질을 해 왔다. 공부해서 판검사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며 어린 강호를 몰아세우는 영순의 모습은 아동 학대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나쁜 엄마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영순의 상황을 생각하더라도 어린 아이에게 밥도 제대로 먹이지 않고 공부 외에 모든 것을 금지하는 강압적인 태도가 일부 시청자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에 대해 라미란은 엄마로서 자신 역시 영순을 이해하거나 면죄부를 줄 순 없다고 설명했다.
“저도 영순이 이해되지 않아요. 하지만 영순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런 괴물을 만들었다’고 후회하게 되는 거죠. 누구나 그런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잘못된 인생을 걸어가기도 해요. 저는 영순이처럼 모진 풍파를 겪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강호에게 영순이가 한 행동을 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영순의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기했었죠. 삶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의 입장에선 영순이가 강호에게 행하는 일들이 정말 가혹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하지만 영순은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물론 나중에 사죄하고 용서를 빌 만큼 큰 잘못을 한 것이란 건 스스로도 알았을 게 분명해요.”
그런 영순이 위암 4기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않은 강호를 거세게 몰아세우는 장면은 시청자들이 가장 많은 질타를 퍼부은 신 중 하나였다. 7세 아동의 지능을 가지고 휠체어가 없으면 걷지도 못하는 아들을 차가운 시냇물에 집어넣고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게 다그치는 영순을 보며 “엄마가 미친 게 아니냐”는 뿔난 시청자 댓글들이 이어졌다. 그 댓글을 실시간으로 다 확인하고 있었다는 라미란은 “그 신에서 정말 욕을 제일 많이 먹었던 것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신 찍을 때 (이)도현이가 고생을 정말 많이 했죠. 물속에 오래 들어가 있어야 했거든요. 시청자 분들이 몸도 아픈 강호를 찬물에 계속 밀어 넣는 걸 보시면서 ‘엄마가 미쳤다, 급발진한다’고 욕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제가 연기할 때 생각한 영순의 마음은 그때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상태였어요. 강호를 어떻게 해서든 혼자 살아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래서 정말 연기도 독하게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원래 팔 힘이 하나도 없는 편인데 그날 연기할 땐 강호 휠체어를 확 집어던지더라고요. 그때야말로 정말 엄마들의 ‘슈퍼 파워’가 나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웃음).”
시청자들이 이처럼 깊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데엔 엄마 라미란과 팽팽한 연기 합을 만들어 낸 아들 이도현이 있었다.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칠 수밖에 없었던 냉철한 검사에서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곱 살 아이까지, 이전에 그가 출연한 작품에선 볼 수 없었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완벽히 만들어 냈다. ‘나쁜 엄마’가 공개되기 전, 넷플릭스의 화제작 ‘더 글로리’로 커다란 이슈를 몰고 왔던 이도현이었던 만큼 그의 성공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더 글로리’로 더 뜨기 전에 우리 작품에 캐스팅하길 정말 잘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는 뒷이야기도 있었다.
“사실 강호가 어려운 캐릭터잖아요. 완벽한 타이틀 롤도 아니고 연기도 어려워서 캐스팅도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이도현 배우가 캐스팅됐어요. 저는 이도현 배우의 전작을 거의 다 봤는데 이 배우가 가진 연기의 폭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런데 실제로 촬영해 보니까 더 좋더라고요(웃음). ‘이 친구는 정말 잘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러다 저희 촬영 중간에 ‘더 글로리’가 방영돼 가슴을 쓸어내렸죠. ‘일찍 캐스팅 계약하길 정말 잘했다’(웃음). 이도현 배우는 앞으로 더, 더 잘될 거예요. 강호 역을 하기로 결정하면서도 그랬대요. 정말 이때 아니면 못할 것 같고, 너무 도전하고 싶은 역할이었다고. 그 말 듣고 정말 대견했어요.”
자신의 모든 힘을 온전히 쏟아 부은 작품이었다고 자평한 ‘나쁜 엄마’를 넘어 라미란은 영화 ‘시민 덕희’를 비롯해 하반기 방영 예정인 드라마 ‘잔혹한 인턴’,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 등 주연 작품으로 대중과 다시 한 번 마주할 예정이다. 영화로는 이미 여우조연상과 여우주연상을 모두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주연으로 깊은 쐐기를 박아 단단히 고정하고 있는 드라마로도 여우주연상을 노려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기억에 정말 오래 남을 작품들은 10년마다 한 번씩 오는 것 같아요. ‘나쁜 엄마’도 제게 그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찍는 동안도 행복했고, 찍고 나서 방송을 보면서도 행복했고 그러면 배우들에겐 최고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신 것 또한 너무 감사하고요. 제가 이제까지 찍은 드라마나 영화를 다 합치면 60편 정도 될 것 같은데, ‘나쁜 엄마’가 그 안에 몇 개의 기둥 중에 또 하나가 되지 않을까요. 이제 지금부터는 다시 또 한 번 올라가 봐야겠죠. 다음 청룡시리즈어워즈상도 또 타야 하니까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