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주주처럼 자율복 입고 ‘찬성’ 외쳐라”
▲ 삼성SDI 전경. 삼성SDI 주총에서 수년간 조직적인 부정행위가 지속돼 왔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정기 주총 하루 전 삼성SDI는 ‘원활한 주총’이라는 목적 하에 주주를 가장한 직원들을 잔뜩 모아놓고 실전과 다름없는 리허설까지 실시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일요신문>은 삼성SDI 주총에서 지속적으로 부정이 자행되어왔다는 한 증거로 <2003년 삼성SDI 제33기 정기 주주총회 리허설> 녹취록을 입수했다. 리허설 녹취록에는 삼성SDI가 직원들을 주주로 위장하기 위해 미리 섭외해 놓은 직원들에게 특정 발언은 물론 옷차림과 표정 등 세세한 부분까지 연습시키는 것은 물론 대량의 주식을 삼성SDI 직원들에게 임의로 위임처리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파문이 예상된다. 또한 이러한 행위가 다른 계열사에서도 실시됐으며, 2003년 이후에도 지속돼 왔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녹취록에 따르면 당시 주총 리허설을 주도한 사람은 삼성SDI 인력개발팀의 A 부장이다. A 부장은 다음 날 주총에 참석하기로 되어있는 당사 직원들을 모아놓고 주총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다. “내일 있을 원활한 주총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 A 부장은 “리허설은 실전과 같이 하자” “회사 직원이 아니라 주주로 참석한다고 생각하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녹취록에는 이러한 주총 리허설이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삼성SDI뿐 아니라 삼성전자 같은 계열사에서도 동일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우선 A 부장은 “이왕 박수 치는 거 세게 치세요”라며 주총 분위기를 띄운다. 본격적인 리허설에 들어가기 전 A 부장은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에서 달랑 주식 한 주 들고 와서 ‘깽판’치는 사람들이 있었다”며 리허설의 진짜 목적을 넌지시 내비치는가 하면 소액 주주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리허설은 식순에 따라 실전처럼 진행됐다. A 부장은 직원들에게 “내일 와서는 사장님을 ‘사장’이 아닌 주총을 이끌고 나가는 ‘의장’이라 생각하라. 사장님이라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나. 내가 투자한 회사의 의장이라 생각하고 사장님이 ‘이의 없습니까’라고 질문하면 큰 소리로 ‘이의 없습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했다. 주총에 주주를 가장한 회사직원들이 대거 동원됨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삼성SDI가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직원들을 철저히 교육시키는 부분이다. 실제로 녹취록에는 ‘진짜 주주’들로부터 의심을 피하기 위해 구체적인 부분까지 연습하는 장면도 다수 들어있었다.
모든 의결이 반대 의견에 부딪히지 않고 원활하게 통과되도록 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찬성’ 멘트를 연습시키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대로라면 실제 주총현장에서 진짜 주주의 목소리가 묻힐 것은 너무도 자명해보였다.
리허설은 생각 이상으로 치밀하게 이뤄졌다. 리허설 내내 가장 강조된 것은 ‘자연스러움’이었다. A 부장은 직원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이의 없다’ ‘찬성한다’라고 동시에 대답하면 섞여서 ‘~다’밖에 안 들린다. 그러니 오른쪽에 앉은 사람들은 ‘이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이쪽 편에 앉은 사람들은 ‘찬성합니다’라고 크고 정확하게 말하라. 그렇다고 너무 이쪽 저쪽 딱 갈라지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을 수 있다. 그러니까 각자 마음속에서 어떤 대답을 할지 생각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되도록 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 드라마 <초한지>의 주주총회 장면.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따로 있었다. 녹취록에는 삼성SDI가 대량의 주식을 당사 직원에게 위임처리하는 불법을 자행하고 순식간에 직원을 주주로 조작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들어있었다. 직원들에게 A 부장은 “혹시 삼성SDI 주식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은 분? 아무 걱정마라. 주식 갖고 있도록 다 만들어놓겠다. 왜냐하면 위임장이 왔다. 회사에서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무려 1600만 주가 왔다. 나도 위임받은 게 무려 720만 주다. 그러니까 나도 720만 주 주주인거다. 상당히 기분이 좋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주목할 부분은 녹취록에 주총과 관련된 이러한 불법이 회사 고위급 인사차원에서 주도적으로 계획·실시된 정황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주총 리허설에 당시 삼성SDI 사장이었던 김순택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이 직접 등장한 것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리허설 말미에 A 부장이 “여러분들을 격려하기 위해 내일 이 자리에 서 계실 사장님이 오셨다”라고 소개하자 김 사장이 뜨거운 박수와 함께 현장에 등장했다.
김 사장의 멘트는 이러한 부정이 처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자행되어 왔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김 사장은 직접 마이크를 잡고 “뒤에서 여러분들 수고하시는 거 잘 지켜봤다. 여기 계신 분들 상당수는 이미 몇 번 주총에 참석하신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일 30분 정도만 고생하시면 별 무리 없이 끝날 것이다. 나는 몇 번 해봤으니까 큰 무리 없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내일 주총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당부 드린 대로 해 달라. 다들 최선을 다해달라”고 부탁했다.
리허설은 당부의 말로 끝났다. A 부장은 “위임장을 준비해 놨다. 일단 받으면 성명을 써라. 그리고 찬성과 반대란 중 어디에 동그라미를 해야 하는지는 다 아실 거라 생각한다. 위임장을 받은 분은 이게 원본이기 때문에 내일 꼭 와야 한다. 분실하면 집계사항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와야 한다”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또 아침 일찍 와서 자리를 차지할 것을 주문하는 내용도 있었다. 직원들이 자리를 점령하도록 함으로써 다른 주주들이 앉을 자리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각본대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것에 쐐기를 박는 멘트였다.
주총에서 결의가 다수결 원칙에 따라 이뤄진다는 점에서 당사 직원을 동원한 주총은 심각한 불법이라 할 수 있다. 타인의 주식을 당사직원에게 임의로 위임장을 발부해 조직적으로 주총의 공정하고 올바른 진행을 방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주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넘어 공정사회에 대한 도전이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전 직원 B 씨로부터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B 씨는 “리허설까지 펼치며 쇼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얼마나 은폐와 조작이 많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삼성의 이러한 행위는 2003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왔다. 삼성SDI뿐 아니라 다른 계열사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삼성은 이런 식으로 소액주주는 물론이고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려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공정한 주총을 방해해왔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과거 참여연대는 주총 부정관련 삼성전자를 고발하기도 했다. 삼성전자가 주주의 의사진행 발언권 자체를 봉쇄했을 뿐 아니라 항의하는 주주에게 의장이 ‘주식 몇 주나 갖고 있냐’ ‘남의 주총에서 떠들지 마라’ ‘저 양반 정신병자 아냐?’ 등의 폭언과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이와 관련 참여연대 측은 “의장이 주주의 정당한 발언권 행사를 봉쇄하고 회사 측한테만 유리한 내용으로 편파적으로 의사를 진행하여 이끌어낸 결의는 법적 실효성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B 씨는 “이는 ‘진짜 주주’들에 대한 심각한 배신이자 기만이라 할 수 있다. 주총과 관련된 잡음은 삼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주주들이 이런 사실을 알면 가만있겠나. 아마 고발이 들어가고 난리날 것이다. 특히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삼성은 겉으로는 최고의 엘리트들이 선망하는 투명하고 공정한 기업을 표방하면서 정작 사원들에게 비도덕적이고 지저분한 부정행위를 교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편 이와 관련 삼성SDI 관계자는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직원들을 주주로 위장해 연습을 시키고 사측에서 임의로 위임장을 발부했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겠나”라고 극구 부인했다. 2003년 녹취록을 근거로 해명을 요구하자 삼성SDI측은 “과거에는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