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란 얼굴만 보면 자꾸 눈물 나 놀림 받아…미국·일본에서도 알아봐 해외 인기 체감”
“일곱 살 강호뿐 아니라 고등학생 시절을 연기할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너무 학생처럼 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냥 도현이 너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던 것도 있고요. 과하지 않게 일곱 살처럼, 초등학생처럼, 중학생처럼 다양하게 연기하면서 어린 강호부터 성인 강호까지의 연기 방향성을 잡아나갔죠. 어쨌든 서른다섯인 강호와 기억을 잃은 채 일곱 살이 된 강호는 상황이 다를 뿐이지 같은 사람이니까요. 내 자신에게 그 설정이 설득되지 않는다면 이야기를 끌어나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 종영한 JTBC 수목드라마 ‘나쁜 엄마’에서 이도현은 서울중앙지검의 잘나가는 검사였다가 권력 싸움으로 희생되면서 전신마비와 일곱 살 수준의 정신장애를 갖게 된 최강호를 연기했다. 최강호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아버지가 권력자들의 음모에 휘말려 자살 같은 타살을 당했고, 그런 아버지의 한을 푸는 것에 인생을 바친 어머니 영순(라미란 분)에게 꼭 판·검사가 돼야 한다는 집착을 받아온 인물이다.
영순은 남편의 죽음이 돈도 힘도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서 비롯됐다고 탓한다. 아들 강호만큼은 권력을 가져 그런 삶에서 벗어나길 원했기에 더욱 쉴 새 없이 채찍질해 왔지만, 배가 부르면 졸려서 공부를 못 한다며 밥도 제대로 먹이지 않고 어린 강호를 몰아세우는 장면을 두고 시청자들 사이에서 “아동학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강호가 사고로 일곱 살의 정신을 갖게 되면서 영순 역시 지난날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 이 비판은 조금씩 사그라졌지만 그래도 영순의 과거가 마냥 용서 받을 수는 없다는 평도 여전했다. 이 부분에 대해 아들인 강호 입장에서 이도현은 “그때는 몰랐어도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 보면 엄마의 사랑이란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학대처럼 보일 수 있는 부분도 당연히 있겠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다 엄마가 아들을 사랑해서 한 행동이었을 거예요. 만일 그 당시에 엄마가 그렇게 혹독하지 않았다면 저는 아빠의 죽음에 대한 비밀도 파헤치지 못했을 것이고, 부모님의 한과 억울함도 풀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때는 엄마가 미울 수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론 엄마가 이해가 되는 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나쁜 엄마’ 촬영 기간 동안 엄마 영순 역의 라미란과 현실 모자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냈다는 이도현의 실제 모자 관계는 어땠을까.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이도현 역시 공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어머니에게 늘 불만을 품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수학이 왜 중요한지, 영어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 투덜거렸지만 스물여덟의 이도현이 되고 나니 그때의 어머니가 이렇게 감사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제 어머니는 학생은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편이었어요. 당연히 그때 저는 너무 싫었죠. ‘난 공부가 싫은데 왜 해야 해, 내 체질에 안 맞아!’(웃음) 그랬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 공부가 지금의 제가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거예요. 화술도 그렇고 영어도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고요. 수학 같은 경우는 그때 공부한 덕분에 제가 ‘멜랑꼴리아’에서 수학천재 역할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종종 제가 그래요. ‘엄마가 날 혹독하게 키워주신 덕에 내가 수학자 역할도 해볼 수 있는 거 아니겠어!’(웃음)”
이도현의 어머니가 ‘나쁜 엄마’의 열혈 시청자였던 점도 새롭게 알려졌다. 방영되는 동안 집에 들르면 ‘도현아’라는 평소 호칭 대신 ‘강호야’라고 부를 정도였다는 어머니는 강호가 언제쯤 다시 두 발로 걷고 제정신으로 돌아올지 몹시 궁금해 하셨다고 한다. 진짜 어머니가 이렇게 새 아들 강호에게 몰입하고 계신 동안 이도현은 새어머니 영순에게 푹 빠져 있었다는 뒷이야기도 있었다. 영순을 캐릭터 이름 대신 ‘엄마’라고 부른 이도현은 “엄마 얼굴만 보면 안 그래야 하는 신에서도 자꾸만 눈물이 나와서 큰일이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울면 안 되는 신에서까지 울어버리는 바람에 엄청나게 놀림 당했어요(웃음). 그런데도 이상하게 엄마만 보면 계속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아마 엄마와 교감이 많이 돼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 덕에 현장 분위기도 편해졌던 것 같고요. 원래 제가 낯가림이 굉장히 심한 편인데 라미란 선배님 덕을 많이 봤어요. 항상 제게 먼저 장난을 쳐주셨거든요. ‘어, 너 이번에 또 울 거야? 울어, 울어!’ 하시면서(웃음). 그런데 그렇게 장난치시다가도 촬영이 들어가면 사람이 확 바뀌세요. 저도 그렇게 연기하고 싶어서 여쭤봤더니 선배님이 ‘좀 더 편하게, 이곳이 놀이터라고 생각하고 놀아라’라고 조언해주셨어요. ‘나쁜 엄마’는 제게 있어서 그런 새로운 연기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던 곳이라 또 다른 의미가 있죠.”
라미란은 먼저 진행한 ‘나쁜 엄마’ 종영 인터뷰를 통해 “도현이가 ‘더 글로리’로 더 뜨기 전에 얼른 잡아서 다행이었다”는 농담을 던진 적이 있었다. 국내를 넘어서 해외에까지 또 한 번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신드롬을 일으켰던 ‘더 글로리’의 공개 전후로 이도현이 직접 체감한 변화도 있지 않았을까. 그의 얘기로는 실제 가까운 주변부터 바뀌기 시작했다고 했다고 한다. 특히 해외 팬들에게서 ‘사인을 해 달라’는 요구가 많아진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작품이어서 그랬는지 해외에 나가 있는 제 친구한테도 갑자기 연락이 오더라고요. 자기 친구를 위해서 사인을 하나 해 달래요. ‘네 친구 미국인 아니야?’ 물어봤더니 ‘더 글로리’를 보고 저를 알게 됐다는 거예요(웃음). 심지어 5월에 해외 행사를 갔는데 일본 팬 분들도 저를 바로 알아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좀 이상해요. 해외 분들이 저를 알아보시다니(웃음)! 그만큼 책임감도 들면서 한편으론 ‘국가대표’가 된 느낌도 들죠(웃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스위트홈’부터 ‘더 글로리’, 드라마로는 ‘18어게인’부터 ‘오월의 청춘’까지 최근 출연한 모든 작품에서 대중에게 굵직한 인상을 남긴 이도현의 대표작 리스트에는 이제 ‘나쁜 엄마’도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 역시 넷플릭스에 공개되면서 해외 시청자들로부터도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만큼 라미란이 우려(?)한 이도현의 몸값은 ‘나쁜 엄마’를 딛고도 앞으로 더욱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처럼 최근 2~3년 동안 공개한 작품이 작품성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은 데다 대중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입대를 앞둔 이도현의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 부분에서 저는 운때가 잘 맞아 떨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얼마 전에 ‘나쁜 엄마’ 마지막 회를 보면서 정웅인 선배님(오태수 역)께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선배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면서 ‘운도 운인데, 그건 네 실력이야’ 하고 자신감을 많이 실어주셨어요. 그때부터 저도 스스로를 많이 다독이고 칭찬해주게 됐죠. 이제까지 정말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했고, 그래서 이렇게 결과물이 있을 수 있었던 거다. 그런 면에서 정웅인 선배님께 감사해요. 앞으로도 저는 계속 그렇게 할 거예요. 매사 최선을 다하면서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