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 말뚝 세우고 ‘큰꿈’ 다시 꿔볼까
▲ 형수의 회사인 현대상선 지분을 매입한 정몽준 의원의 속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
현대중공업 측은 현대그룹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 지분을 기습적으로 매입하며 ‘외국계 자본의 적대적 인수 합병을 막기 위한 백기사’임을 자처했지만 현대그룹 측은 경영권 찬탈 의도로 규정하고 있다. 현 회장 측은 노골적으로 이번 지분 매입사태의 배후로 정 의원을 공개 지목하고 일전불사 태세를 갖추고 있다. 반면 현대중공업은 여전히 ‘백기사’를 자처하며 현대 측이 제기한 ‘현대건설 인수 참여설’도 강력 부정하고 있다. 현 회장의 타깃이 된 정 의원 역시 말을 아끼는 상태다. 과연 현대중공업의 실질적 소유주인 정 의원의 의중은 무엇일까.
우선 현대중공업의 지분 매입이 정말 ‘백기사’ 역할을 위함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현대그룹은 적대적 인수 합병을 위한 방편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대그룹 측이 이처럼 주장하고 나선 것은 현대중공업과 골라LNG의 친분 때문.
현대중공업에 현대상선 지분을 넘긴 골라LNG는 현대중공업의 오랜 고객이다. 골라LNG는 해상운송 전문회사들을 거느린 법인으로 그동안 현대중공업에 여러 척의 대형선박들을 발주했다. 골라LNG 계열 제버런트레이딩이 지난 4월 24일 현대상선 지분을 취득했을 때 외국계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 논란이 불거졌지만 불과 3일 만에 이 지분을 현대중공업에 넘긴 것을 두고 양측의 ‘사전 교감설’이 증권가에 나돌았다. 현대중공업이 현대그룹과 사전 논의 없이 골라LNG의 지분 매입 제의를 받고 실행에 나선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추측은 더욱 힘을 얻었다.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이 정말 백기사를 자처한다면 현대상선 지분 10%를 현대 측에 넘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바라는 대로 현대중공업이 지분 이양을 검토하게 되더라도 문제는 간단치 않다. 현대상선의 폭발적인 주가 상승 때문.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 매입을 발표한 지난 4월 24일 현대상선 주가는 1만 6700원이었다. 이후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더니 5월 4일 주가 2만 6000원을 기록해 일주일 만에 무려 1만 원 상승이란 기염을 토했다. 증권가 관계자들은 “현대상선 상한가 행진은 ‘현대상선에 대한 인수 합병 기대 효과’에서 비롯된 것”이라 입을 모은다. 결과적으로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주가 폭등을 불러온 셈이다. 이에 대한 계산을 어떻게 할지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지분 매각 의사가 절대 없는데 계산법을 논하는 것은 더욱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세간에 떠도는 대로 범 현대가의 ‘담합’이 실제 있었는지에도 시선이 쏠린다. ‘범 현대가에서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정몽준 의원이 범 현대가 인사들을 찾아가 현대건설 인수를 허락받았다’는 소문에 대해 현대중공업은 전면 부인했다.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
정몽준 의원이 맏형 정몽구 회장을 만나 사전조율을 했을 가능성에 대해 재계인사들의 평가는 분분하다. 정 의원이 정몽구 회장의 암묵적 동의 없이 현대상선 지분인수를 통해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면 이는 곧 ‘정몽구 회장이 구속된 사이 정 의원이 일을 벌여 현대가 적통계보를 이으려한다’는 추론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사전조율했기 때문에 정몽구 회장이 구속됐음에도 정 의원이 일을 벌일 수 있었다는 관측이다.
현대건설은 현대상선 지분 8.69%를 보유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기존 지분에 KCC 소유 지분을 합하면 현대중공업의 실질적 지분은 40%가 넘어가 현대상선 장악이 수월해진다. 지난 2003년 ‘시숙부의 난’을 벌였던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정몽준 의원과 관계가 원만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상선은 현대그룹 계열사 지분을 골고루 소유한 법인이므로 ‘현대중공업의 현대건설 인수는 곧 현대그룹 지배’라는 추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대가 장자인 정몽구 회장의 자부심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반론도 있다. 재계에선 현대건설 인수가 고 정주영 명예회장 유지를 받든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룹 경영이 다시 안정을 되찾으면 정 회장이 현대차그룹의 건설계열사인 엠코를 기반으로 현대건설 인수를 추진할 것이란 관측도 대두되고 있다.
일각에선 정 의원이 현대건설과 더불어 선친 유업인 대북사업 분야에 큰 애착을 갖고 있다는 평도 나온다. 정 의원은 지난해 축구협회장 4선에 성공한 뒤 ‘이번 임기만 마치고 2009년에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유력후보였으며 얼마 전 야당의 서울시장 후보 물망에도 오르긴 했지만 과거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축구협회장직을 통해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정 의원이 현대그룹의 현대아산에서 주도하는 대북사업의 새 얼굴로 등장해 선친의 유업을 잇는 동시에 정치적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으려할 것이란 풀이도 가능하다.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 매입 이후부터 현 회장의 현대그룹은 연일 정 의원을 향해 맹공을 퍼붓고 있다. 정 의원이 형수의 경영권을 찬탈하려 하고 있다는 홍보효과를 노리는 동시에 현대그룹에 대한 동정적 여론몰이로 풀이된다.
정 의원 입장에선 6년 전이 떠오를 법하다. 2000년 5월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중공업 지분 11.05%를 인수하자 정몽준 의원이 정몽헌 회장 자택을 찾아갔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은 만나지 못하고 형수인 현 회장이 차려준 밥만 먹고 돌아섰다고 한다.
지난 5월 4일 정 의원은 최근 언론과의 접촉과정에서 “때가 되면 알게 될 것” “길게 보자”는 말을 남겼다. 6년 전과는 반대로 현 회장이 정 의원 집에 찾아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