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왕자” 추태 그려놓고 “가상의 설정” 주장…아랍 네티즌 “중국드라마에 한복·김치 나와도 이해할 건가”
앞서 지난 7월 8일~9일 방송된 '킹더랜드'에서는 극의 배경이 되는 킹호텔 VIP 고객으로 아랍 왕자 사미르가 투숙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사미르는 극 중 세계 부자 랭킹 13위로 호텔에 하루만 묵어도 한 달 매출을 채울 정도의 부호로 그려진다. 킹호텔 본부장이자 남자 주인공 구원(이준호 분)과는 유학시절 인연으로 맺어진 앙숙 사이로 여주인공 천사랑(임윤아 분)을 두고 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문제가 된 부분은 사미르가 클럽에서 여러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마시고, 유흥을 즐기며 돈자랑을 하는 장면이었다. 천사랑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질투한 구원은 사미르에 대해 "여자친구가 100명도 넘고 이혼도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드라마 방영 후 아랍 국가의 시청자들은 "우리들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있다"며 거센 비판을 쏟아냈다. 종교적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아랍 국가 출신의 캐릭터를 묘사하면서 클럽에서 유흥을 즐기는 모습을 과장되게 보여주거나 호색한 이미지를 떠안게 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한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 트위터리안은 "(해외 대중매체에서) 아랍인은 테러리스트 아니면 방종한 왕족, 재벌로만 그려진다.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을 우려해 신중하게 묘사하면서 아랍인만큼은 늘 부정적인 묘사를 하고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주장한다"고 지적했다.
해외 시청자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킹더랜드' 측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지역, 지명 등은 가상의 설정이며, 특정 문화를 희화화하거나 왜곡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제작진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며 시청에 불편함이 없도록 더욱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하겠다"는 짤막한 해명문을 내놨다. 그러나 이미 '아랍 왕자'라며 아랍 문화권을 겨냥한 캐릭터성을 극 중 직접 언급하기까지 했고, 사미르가 착용한 복장 역시 '가상의 국가'가 아닌 실재하는 한 아랍 국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며 "생각 없이 제작하고, 존중 없이 해명했다"는 시청자들의 더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아랍 국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JTBCAPOLOGIZE(JTBC 사과해)' 'KdramaOffendsTheArabs(K드라마가 아랍인들을 불쾌하게 했다)'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들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이들은 "진정한 사과가 있을 때까지 아랍인들은 더 이상 JTBC의 어떤 작품도 보지 않을 것이며 작품의 평점을 낮출 것" "가상이라서 다른 나라 문화를 폄훼하고 왜곡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한국인들은 왜 중국 드라마에 김치와 한복이 나오는 걸 참지 못하나" "흑인의 머리 모양과 피부색을 흉내낸 한국 연예인은 비판을 받고 곧바로 사과했지만 아랍인들을 모욕한 한국 방송사는 우리의 비판이 착각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한다. 모욕 당해도 괜찮은 인종과 문화는 없다"고 분노를 표출했다.
한국 시청자들 역시 JTBC에 항의를 이어가고 있다. '킹더랜드'의 공식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는 "아랍 인종차별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문제의 신을 편집하라"는 취지의 글들이 7월 10일부터 게시됐다. 아랍 국가에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최근 K팝을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가 큰 인기를 끌어 왔지만 이번 이슈로 한국에 부정적인 인식이 심어진다는 점을 우려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처럼 나라 안팎에서 비판이 이어지고 있지만 제작진과 방송사는 짧은 해명 이후 별다른 액션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태다. 이런 가운데 뿔난 해외 시청자들의 분노는 온전히 배우에게 향했다. 사미르를 연기한 인도 출신의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의 인스타그램은 아랍 네티즌들의 비난 댓글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미르의 캐릭터적 희화화 외에도 중동 국가 출신 배우가 아닌 아누팜이 연기했다는 점이 분노의 한 이유가 됐던 만큼 제작진이 입을 다무는 동안 배우에게 비난의 집중포화가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킹더랜드'가 최근 제작되는 작품 답지 않게 민감한 이슈에 무지하게 다가갔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K팝부터 영화까지 모든 콘텐츠 제작 영역에서 최근 5년 사이 문화다양성과 관련한 이슈가 수차례 불거지고, 제작진이나 배우 또는 가수가 사과하는 일들이 반복돼 왔는데도 또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한국 콘텐츠가 한국 안에서만 소비되는 게 아니라 전세계로 동시에 공개되다 보니 이전에는 어떤 문화의 스테레오 타입이나 클리셰라고 여겼던 설정도 재차 확인해 작품 외 이슈가 불거지지 않도록 하는 게 제작진의 또 다른 숙제가 됐다"라며 "모든 시청자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더라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세심하게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