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몽구한테 회사 주는 게 뭐 잘못됐어?”
▲ 지난 98년 1월 한 행사장에서 함께한 정세영 당시 현대차 명예회장(오른쪽)과 정몽구 현대정공 회장. 정세영 명예회장은 2개월 뒤 왕회장 한마디에 회사를 내줘야 했다. | ||
당시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던 정세영 회장(정 회장)은 큰형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올라 와”라는 호출 통보를 받고 명예회장실로 올라갔다.
그에게 던져진 말은 “몽구가 장자야. 장자한테 자동차 회사를 주는 게 뭐 잘못됐어?”라는 통보였다. 이 한마디 말로 국내 기업사에 전무후무한 오너 맞바꾸기가 벌어졌다. 정 회장이 정몽구 회장 소유였던 현대산업개발 오너로 가고, 현대차의 납품업체인 현대정공 회장이던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의 오너가 됐다. 이틀 뒤인 3월 5일 포니 정으로 통하던 정 회장은 현대자동차 직원들에게 고별사를 낭독하고 현대차를 떠났다.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 변신한 그는 2000년 11월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부제는 정세영의 자동차 외길 32년. 그가 67년 12월 사장 취임을 기점으로 경영 30년에 발맞춰 나올 책이었지만 경영권 변화라는 변동이 생기면서 발간이 늦춰진 것.
정세영 회장이 작고한 지 1년이 지난 최근 정 회장의 자서전 작업에 관여했던 작가 이호 씨가 그 책에 미쳐 실리지 못했던 또는 행간에 가려질 수 밖에 없었던 내용을 중심으로 <이호의 비밀수첩 첫번째-정세영>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DJ 정부에 대한 기업인의 평가나 MK(정몽구 회장) 등장 이후 현대차 인맥들이 갖고 있는 미묘한 갈등, 최근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기아차 인수 문제 등을 담고있어 눈길을 끈다. 책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98년 파업과 DJ의 본심
98년 7월부터 8월까지 현대자동차에는 32일간의 파업이 벌어졌다. 당시 현대차는 9427억 원의 매출 손실과 10만 4700대의 생산차질이 생겼다.
파업의 쟁점은 정리해고 문제였다. 그해 2월 노사정위원회가 합의한 ‘정리해고에 관한 노동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현대차 노조는 이를 거부하고 장기파업으로 간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정 회장은 DJ에 대해 깊은 불신을 안게 됐다고 한다. 정리해고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켜 놓고서도 DJ나 청와대, 노동관계 핵심비서진은 정리해고를 원치 않고 있으며, 어쩌면 정리해고가 가능하도록 법제화한 새로운 노동법은 대내외 전시용으로 써먹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까지 갖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정 회장의 발언.
“우리 중역이 가서 만났는데 사회복지 수석이라는 사람이 법과 질서는 서구 민주국가에나 있는 거라고 공권력 투입을 반대하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소리가 청와대 수석 입에서 나오지? … 큰일 났다 싶은거야.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DJ의 본심이 뭔지. 확실하게 파악을 해봐야지 큰 일 났구나 싶더라고. 당장 다시 확인을 해보라고 했지. 그랬더니 청와대에 35세인가 36세인가 하는 장 아무개씨가 있는데 그 친구가 DJ한테 직보를 하는 인물이라고 그래요. DJ 집부실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이라니까 속을 들어 볼 수 있잖아.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얘기를 주욱 하면서 궁금하다고 했더니 그 친구한테서도 대충 비슷한 대답이 오더라는 거야. 이쯤 되니까 앞이 깜깜한 거야. 진짜 깜깜해. 이 땅에서 기업을 계속해야 되나 싶고 말이지. 좌우간 공권력이 안 들어오겠다는 걸 어떡해.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잖아요. 법이 있는데도 공권력이 안 들어오겠다고 하니 새 노동법을 믿은 우리가 바보짓 했던 것이고. 그래서 내린 결론이 우리가 백기를 들고 정리해고는 없다, 정리해고는 안한다고 선언을 할 수밖에 없다, 선언을 해버리자고 했지.”
결국 이 정리해고 파문으로 시작된 현대차의 노사분규는 그해 8월 23일 끝났다. 애초 6700여 명의 정리해고를 계획했던 현대차 측의 계획은 270여 명 해고로 끝났다. 이 중 200여 명만이 생산인력이고 나머지는 식당종업원과 부대시설 종사자들이었다. 이후에도 현대차는 해마다 파업을 포함한 노사분규를 겪고 있다.
정 씨 일가의 고향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금강산 부근이다.
이들은 왕회장이 대북사업을 본격화하던 98년 6월 부친의 환갑잔치 이후 53년 만에 귀향을 준비하게 된다.
그때 정 씨 일가들은 팁으로 각자 5000달러를 준비해갔다. 평양 시내 관광을 나갔다가 그림을 산다거나 북한 체육관에 시찰 나갔을 때 선수들에게 격려금도 줘야 하는 등 각자 5000달러 정도가 필요하다가 준비시켰다고 한다. 정세영 회장은 이외에 고향 친지들에게 나눠줄 선물로 종합반창고 세트와 항생제 등 가정용 비상 상비약을 준비해 갔다.
방북 당시 김용순 북한아태위원장은 정 명예회장 일행을 위한 잔치를 열면서 농산물 가공공장 화력발전소 건립, 중유 제공 등 아홉 가지를 요구했다. 이에 현대 측은 “검토해보겠다”는 말만 했을 뿐 합의서를 작성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또 정 씨 일가는 그 무렵 중국을 통해 탈북한 정X영이라는 정 씨 친척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실제로는 고향마을 출신일 뿐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인물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고향마을에서 그 여인은 “남조선으로 도주한 여자”로 통했다. 현대 쪽에서도 그 여인이 탈북해 국내에 들어왔을 때 신원확인을 정보기관에 요청했지만 ‘당신네 친척이 맞다’는 얘기에 먼 친척으로 여겨왔었다. 하지만 고향마을 사람들이 그를 “미용소에서 일했고 말밥(구설수)만 잔뜩 일으킨 여자”라며 “친척이 아니다”라고 증언한 것이다.
MK 접수 이후 현대차
정 회장이 현대차 회장으로 있던 30년 동안 직원들 진급 시험에 영어 과목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정 회장이 현대차를 떠나면서 영어시험이 사라졌다. 이에 대해 사내에선 현대정공과 현대차를 합치면서 정공 쪽에서 온 직원들이 진급 시험에서 영어를 본다고 하면 불이익을 받을까봐 정공 출신 임원들이 영어시험을 없애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저런 소리가 나돌자 토플시험으로 대체되는 등 제도가 보완됐다고 전해진다.
또 MK 접수 이후 현대차 임원진 중 400여 명이 옷을 벗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기존 현대차 직원들의 불안심리가 커진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때문에 이것이 현대차의 경쟁력 강화에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것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현대차와 기아차를 함께 경영했던 P 부회장은 MK 리더십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는 “MK 회장의 밀고 가는 힘은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본다. … 후벼파요. 아주 후벼 판다고. 추진하는 스타일도 보니까 그 사람 앞에선체크하고. 내가 지시한 사안도 다른 사람 시켜서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을 해요. 왕회장과 마찬가지로 (MK 회장이) 사람을 절대 복종시키는 재간이 있더라고. 돈으로는 안해요. 돈말고 업무를 가지고 하는데, 아무튼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정리=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