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진 18세 8월 9일 ‘위대한 탄생’을 꿈꾼다
▲ 연합뉴스 |
만약 손연재가 어린 시절 서울 능동 어린이회관 근처에 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체조선수 손연재가 가능했을까? 체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를 묻는 질문에 손연재는 “여섯 살 때 집 건너편, 세종대학교 앞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그때 걸린 플래카드에는 ‘리듬체조 꿈나무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늘 뛰어 놀 공간이 부족해서 안타까워하셨던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꿈나무들 모집반을 찾았고 또래 아이들이 많아서 신나게 뛰어 놀았던 난 체조 배우는 걸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그 후 손연재는 초등학교 입학 후 취미로 시작했던 리듬체조를 본격적인 특기 종목으로 바꾸기 위해 세종초등학교로 전학했고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 저녁도 먹지 않고 연습을 반복했던 스케줄을 소화하게 됐다.
“유연성을 키우기 위해 하루에 3시간 이상 스트레칭을 했는데 너무 아프고 힘들어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다리 찢기는 굉장한 통증이 뒤따랐다. 신기한 건 그렇게 힘들게 훈련하는데도 하기 싫다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린 나이고, 친구와 놀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힘들어도 체조를 놓기가 싫었다.”
▲ 사진제공=IB스포츠 |
“체조하는 딸 때문에 엄마가 ‘생계형 주부’가 됐다. 나 뒷바라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따로 일을 나가시기도 하셨다.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 속에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연습하는 게 고달파도 못한다, 안 한다는 소리를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국제대회라도 나가면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제대로 긴장했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대회라 더 잘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스렸었다.”
손연재는 자신의 집안 형편으로는 러시아에서 훈련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다행이 얼굴이 알려지면서 매지니먼트사도 생기고, 스폰서로부터 후원을 받고, CF 촬영을 하며 목돈을 손에 쥔 게 큰 도움이 됐다. 만약 광고 모델이 안 되었더라면 손연재는 엄청난 훈련비를 충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 러시아로의 도전
손연재는 생애 첫 올림픽 무대에 도전하기 위해 2년 전 러시아 노보고르스크에서 훈련을 하기로 결심한다. 노보고르스크는 한국의 태릉선수촌처럼 다양한 종목의 선수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특히 리듬체조 세계 랭킹 1, 2, 3위 선수들이 노보고르스크 훈련장에서 함께 생활한다. 러시아로 귀화한 쇼트트랙 안현수도 노보고르스크 숙소에서 지낸다.
“맨처음 노보고르스크를 향할 때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좀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리아 콘다코바, 다리아 드미트리예바, 예브게니야 카바예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듬체조 스타들과 한데 어울려 훈련을 받는다는 게 굉장히 떨렸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의외로 생활하기가 편하더라.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곳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엄마가 보고 싶어 혼자 울었던 적도 있지만, 그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오히려 손연재의 어머니 윤현숙 씨가 딸의 프로급 적응기에 깜짝 놀란 나머지 서운함을 나타낼 정도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러시아로 떠나기 전까지 항상 함께 생활했던 모녀지간이었던 터라 어머니 윤 씨는 딸이 러시아에서 생활하며 부침이 많은 시간들을 보낼 것이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잘 적응했고 집, 가족,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묻어둔 덕분에 손연재는 체조 실력이 일취월장해나갔다.
“나도 러시아 가서는 허구한 날 엄마 보고 싶어 하며 울 줄 알았다. 그런데 굉장한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은근히 긴장감도 조성되고, 세계적인 선수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오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 잡념이 안 생긴 것 같다.”
▲ 사진제공=IB스포츠 |
“물론 처음에는 나를 향한 비난들이 가슴을 콕콕 찌를 정도로 아팠다. 체조와 관련해서 건전한 비판을 하는 내용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체조 외적인 문제를 모두 나의 문제인 양 확대해서 비난의 강도를 높이는 부분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때마침 그런 힘든 시간에 러시아로 훈련을 떠났고, 나와 관련된 기사나 댓글은 전혀 보지 않고 지내다 보니 조금씩 덤덤해지고 무심해지는 내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손연재는 그럴 때마다 소속사의 소개로 알게 된 조수경 심리학 박사를 찾아 자신이 안고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 놓는다고 한다. 러시아에 있을 때는 전화 통화를 하며 심리 상담을 받는다고 하는데, 가족, 매니저, 친구들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전문가의 존재는 손연재한테 큰 위로와 힘이 돼주는 것 같다.
# 그들만의 점수
손연재는 한국 체조 사상 처음으로 전 종목에서 28점대의 점수를 올린 우즈베키스탄 월드컵시리즈를 잊지 못한다. 28점대는 세계 정상급 선수가 받는 점수이고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28점대는 쉽게 연결이 안 될 정도였는데, 그걸 현실로 이뤄내다 보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8점대는 동유럽 선수들만이 해내는 ‘그들만의 점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내 점수가 믿기지 않았다. 올 시즌 고무적인 현상은 꿈을 꾸면, 목표를 삼으면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잇단 월드컵시리즈에서의 성적이 그걸 증명해준다. 난 올림픽에서 10위 안에 드는 것도, 메달을 목에 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준비했던 연기를 모두 다 제대로 펼쳐 보이고 끝을 맺는 것이다.”
# 그리고 올림픽
손연재는 인터뷰 내내 올림픽이 자신의 체조 인생에 마지막 목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지만 생각은 성숙했고 진중했다.
“막상 올림픽이 다가오니까 조금씩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렸을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무대가 눈앞에서 펼쳐진다는 생각에 설렘과 흥분도 공존한다. 지금은 메달 색깔보다 치열한 예선전을 거쳐 결선에 오르는 게 가장 큰 목표다. 10위 안에 들어 결선에 진출하게 된다면 아낌없이 모든 걸 쏟아붓고 무대를 내려오고 싶다. 그리고 올림픽을 끝으로 내 체조인생은 본격적인 스타트를 할 것이다. 즉 런던이 내 체조인생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말이다.”
영리한 그는 올림픽 등의 국제대회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긴장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손연재의 체조 인생은 그의 말대로 8월 9일 비로소 출발선을 떠나 또 다른 세계를 향해 달려 나갈 것이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