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강력범죄·아사자 증가하자 내각 질타…코로나 이후 닫았던 국경 열며 민심 달래기 나서
8월 21일 김정은은 평안남도 안석간석지 피해 복구 현장을 시찰했다. 8월 초 태풍 카눈이 휩쓸고 간 곳이었다.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은 구두와 긴 바지를 입은 채 직접 침수된 논에 들어가 간부들에게 각종 지시를 하달했다. 김정은은 김덕훈 내각 총리를 향한 비판 수위를 높였다.
김정은은 “최근 몇 년 동안 김덕훈 내각 행정경제규율이 극심하게 문란해졌고, 그 결과 건달뱅이들이 무책임한 일하는 자세로 국가경제사업을 다 말아먹고 있다”고 했다. 김정은은 “일꾼들의 무책임성과 무규율성이 난무하게 된 데엔 김덕훈 내각 총리의 무맥한 사업 태도와 비뚤어진 관점에도 단단히 문제가 있다”면서 “김덕훈 총리가 나라의 경제사령부를 이끄는 총리답지 않고 인민 생활을 책임지는 안주인답지 못한 사고와 행동에 유감을 금할 수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아울러 김정은은 “김 총리의 무책임한 사업 태도와 사상 관점을 (조선노동당) 당 차원에서 똑똑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면서 “당 중앙의 호소에 호흡을 맞출 줄 모르는 정치적 미숙아들, 경종을 경종으로 받아들일 줄 모르는 지적 저능아들, 인민 생명 재산 안전을 외면하는 관료배들, 당과 혁명 앞에 지닌 책무에 불성실한 자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은 고위 간부들을 향해 ‘건달뱅이, 틀려먹은 것들’ 등 표현을 섞어가며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 일부 간부들에 대한 출당 등 고강도 검열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간 언론에 조명되는 강도가 비교적 적었던 김덕훈 북한 내각 총리가 돌연 김정은의 ‘제1 타깃’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김 총리는 코로나19 국면에서 북한 엘리트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1961년생으로 추정되는 김 총리는 ‘중공업통’으로 남포시 대안구역 소재 사업소 등에서 지배인을 지내며 성장했다.
김 총리는 2014년 3월 북한 중앙 정계에 진출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2014년 4월엔 내각 부총리로 떠오르며 초고속 영전했다. 김정은 정권 행정분야에서 핵심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2020년 1월 북한은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확산 조짐을 보이자 국경을 전격 폐쇄했다. 북한 쇄국정책의 시작이었다. 코로나19 국면에 돌입한 지 두 달이 지난 2020년 4월 김 총리는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장 직을 달았고, 2020년 8월 내각 총리로 전격 발탁됐다. 2020년 여름 한반도를 강타한 폭우 피해와 코로나19 확산 방지 등을 추진할 내각 책임자이자 북한 행정 권력 정점에 오른 셈이었다.
김정은 시대 이후 승승장구하던 김 총리가 최근 김정은 제1 저격 대상으로 떠오른 이유는 따로 있다. 한 대북 소식통은 “최근 북한 내부적으로 김정은 리더십이 상당히 흔들리고 있는 양상”이라면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경제가 빈곤해지는 가운데, 범죄율도 증가하고 있는 점이 김정은 리더십을 휘청거리게 만든 가장 주요한 원인들”이라고 짚었다.
이 소식통은 “본인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김정은은 인민들을 대상으로 현 시점 혼란한 북한 내부 상황 책임이 본인이 아닌 내각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차원에서 강도 높은 저격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건달뱅이, 미숙아, 저능아 등 직설적 표현을 거침없이 활용한 이면 본질엔 지금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혼란이 모두 내각 책임이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 내부가 뒤숭숭한 이면엔 태풍 피해만 있는 게 아니다. 동아일보는 7월 중순경 평양 인근에서 발생한 폭발물 테러 추정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에서도 가장 보안이 삼엄한 평양에서의 폭탄 테러는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이 사건이 우발적인지 계획적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의 불안정한 내부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시그널로 읽히고 있다.
북한 내부 강력범죄 발생 빈도도 높아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앞서의 대북 소식통은 “북한 내부에서 꾸준히 범죄율이 증가하는 가운데, 2023년 들어선 살인, 강도 등 강력범죄 비율이 높아지며 사회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고 했다. 소식통은 “2020년 코로나19 국면 이후 고난의 행군에 비견되는 식량난이 북한 주민들 분노에 불을 붙이고 있는 양상”이라고 했다.
8월 17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정원은 “2023년 1~7월 북한 아사자 발생 건수는 240여 건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서 “최근 5년 동안 같은 기간 평균 110여 건 아사자가 발생한 것과 비교해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라고 브리핑했다.
국정원은 “장마당 세대를 중심으로 김정은 일가와 조선노동당 정책에 대한 거침없는 불평과 집단 항의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북한 당국이 지역당 산하 불평분자 색출을 전담하는 태스크포스를 신설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장마당 세대는 우리나라 MZ세대와 비교할 수 있는 북한 신세대를 지칭하는 용어다.
국정원에 따르면 북한이 2023년 초부터 강도 높게 진행한 ‘범죄와의 전쟁’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범죄율 급증에 대한 처방전으로 북한 당국이 치안 강화에 나섰음에도 통제가 어려울 정도로 범죄가 만연하고 있다.
탈북자도 다시 늘어날 전망이다. 국정원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북한 국경 폐쇄 이후 탈북자가 급감했지만, 2023년엔 99명이 탈북했다”면서 “2022년 대비 3배 늘었다”고 했다. 국정원은 “5월 서해 북방한계선을 통해 귀순한 두 일가족은 김정은 체제에서 가중된 경제난과 코로나19로 강화된 주민 감시 통제에 염증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고 증언했다”면서 “코로나19 국경 폐쇄 조치가 완화돼 국경이 개방되면 (탈북자가) 좀 더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이 직접 호통을 칠 정도로 북한 내부 상황이 혼돈에 빠진 가운데, 북한은 국경을 개방하는 수순에 돌입했다. 먼저 하늘길이 열렸다. 8월 22일 오전 9시 30분 베이징 서우두국제공항에 고려항공 여객기 JS151편이 착륙했다. 고려항공 여객기에 탑승하려는 중국 현지 북한 주민들이 공항에 모였다. 여객기는 약 150여 명 승객을 태우고 오후 1시 5분경 이륙했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8월 21일 “북한 항공사 요청에 따라 2023년 여름과 가을에 ‘평양-베이징’ 여객 노선 정기 항공편 운항 계획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고려항공은 주 3~4회 취항 허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육로를 통한 국경 개방에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북한은 7월 27일 정전협정 기념일 당시 중국과 러시아 외교 사절단을 육로를 통해 들였다. 8월 16일엔 카자흐스탄에서 개최되는 국제태권도연맹 세계선수권에 참가하는 북한 선수단이 압록강 철교를 건너 출국길에 올랐다. 9월 23일 개막하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북한 육로 국경 개방이 본격화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2020년 1월부터 3년 반이 넘게 이어진 북한 국경 폐쇄 조치에 주민들의 경제난, 식량난이 극심해진 상황”이라면서 “북한 내부 혼란을 잠재우려면 결국 식량을 기반으로 한 경제적인 불안요소가 해결돼야 한다”고 했다. 소식통은 “결국 이 부분은 국경 개방을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면서 “러시아는 전쟁 중이고 중국은 부동산 관련 경제위기 시그널이 나고 있는 상황이라 국경 개방 효과가 뚜렷할지 여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김정은이 김덕훈 내각 총리를 향한 불호령과 더불어 서서히 국경을 열어젖히며 내부 민심 동요를 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이런 조치들이 북한 주민들에게 와 닿을 만한 요소가 될지는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