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존여비 인식’ 만연한 북한서 시기상조라는 분석 우세…아들 전면 나서기 전까지 백두혈통 상징 역할 관측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과 함께 시카고 불스 전성기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데니스 로드맨이 2013년 2월 북한을 방문했을 때였다. 농구 광팬으로 알려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로드맨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됐다. 김정은은 로드맨을 만난 자리에서 얼마 전 자신의 딸이 태어났음을 알렸다. 이름은 ‘주애’라고 했다. 김주애 이름이 처음 언급된 시기다.
로드맨 방북 9년 뒤인 2022년 11월 김정은은 다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추정되는 화성-17형 시험발사 현장을 시찰했다. 김정은은 한 여자아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ICBM 개발 현장을 둘러봤다. 김주애의 첫 공식석상 등장이었다.
김정은은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는 남성으로 추정되며, 둘째가 김주애다. 셋째는 성별이 불명이다. 북한에서 김정은 자녀 구성은 백두혈통 4대 세습에 가장 핵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다. 북한 내부 상황에 이해도가 높은 복수 관계자들은 전후 사정이야 어찌됐든 결국 김정은 아들이 4대 세습 대상자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주애 후계자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셈이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조선시대에 가까울 정도로 남존여비 풍토가 만연하다”면서 “북한 주민들이 여성 지도자를 정통성 있는 국가 리더로 받아들일 정서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짚었다. 이 소식통은 “김주애를 표면에 내세운 막후에서 진짜 후계 구도에 대한 구상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라면서 “김주애는 다음 세대에서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고 했다.
김주애가 북한 핵심 전략무기 중 하나인 ICBM 시험발사 현장에 동행한 것은 ‘북한 미래산업 먹거리가 ICBM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려는 취지로도 받아들여졌다. 백두혈통 4세대 중 처음으로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한 김주애를 둘러싼 관심은 적지 않았다. 이후에도 김주애는 ‘김정은 껌딱지’처럼 동행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최근엔 김주애 위상이 한껏 높아진 양상이다. 8월 28일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TV와 노동신문 등은 8월 27일 김정은이 김주애와 함께 해군사령부에 방문한 사실을 보도했다. 약 100일 동안 두문불출을 깨고 등장한 김주애는 지금까지 공개됐던 것보다 훨씬 조숙한 이미지를 선보이며 매체에 등장했다.
흰색 재킷에 정장 바지를 입은 김주애는 열 살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등장했다. 해군사령부에 입장하는 김주애 뒤엔 박정천 북한군 원수와 강순남 국방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사실상 열 살 소녀 김주애가 이들보다 의전서열이 높다는 점을 다시 한번 부각한 셈이다. 김주애 앞에서 사열을 받는 이는 김정은뿐이었다. 이후 김주애는 김명식 북한 해군사령관 거수경례를 받고, 김정은과 함께 작전계획 브리핑을 경청하기도 했다.
김주애 후계자설도 부상했다. 빈번해지는 김주애 등장이 불러온 나비효과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성급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해석했다. 9월 4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민의힘 간사 유상범 의원 브리핑에 따르면 김규현 국정원장은 “북한은 백두혈통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남성 위주 사회인 까닭에 현 단계에서 김주애를 후계자로 판단하는 건 성급하다”고 했다.
9월 5일 통일부에 따르면 2022년 11월부터 노동신문을 통해 보도된 김주애 공개활동 중 80%가 군사부문이었다. 통일부 당국자는 2월 북한 열병식 당시 상황을 거론하며 “주석단에 앉은 사람 중 김주애 앞에만 김정은 연설문으로 보이는 원고가 있었고, 그것을 김주애가 넘겨가며 모니터링했다”면서 “김주애가 주석단에서 김정은 바로 옆에 앉은 것만큼 의미가 있고, (김주애 관련) 의전규범을 만들어가는 단계가 아닌가 한다”고 예측했다.
통일부 역시 김주애 후계자론에 대해선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뉘앙스였다. 통일부는 “김주애가 노출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면서 “(김주애를 정식 후계자로 판단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했다. 통일부는 “전례 없는 모습들을 볼 때 최소한 세습 의지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의 대북 소식통은 “김주애가 예상 이상으로 북한 현지 매체를 통해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김주애가 정식 후계자로 발돋움할 가능성은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소식통은 “김정은 입장에선 2020년경 건강이상설이 불거진 뒤 끊임없이 건강 이슈를 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건강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상황에서 후계구도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소식통은 “유고 시 김정은 후계자로 여동생 김여정이 거론돼 왔다”면서 “김여정 대신 급박한 상황에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직계 후계자를 빠르게 부상시키기 위해 김주애를 부각시켰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는 “백두혈통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개체가 김주애”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소식통은 “김주애는 일종의 보험용 후계자 정도 레벨로 설정한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 소식통은 “정식 후계자로는 아들을 지목할 가능성이 더 크다”면서 “다만 북한 특성상 정식 후계자의 어린 시절 모습이 기록으로 남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김정은이 건강하게 권력을 유지한다는 전제로, 정식 후계자는 완성형 모습으로 전격 공개하려는 마스터플랜이 존재할 것”이라면서 “정식 후계자를 공개하기 전까지 차세대 백두혈통을 상징하는 존재로 김주애를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