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루나·피카코인 사건 재판 잇따라…국내 증권 인정 판례 없는 데다 미국서도 판결 엇갈려 장기화 불가피
하지만 재판 결과가 암호화폐 시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까진 수년이 걸릴 전망이다. 암호화폐의 증권성 여부를 판가름할 '결정적 한 방'이 아직 없어 지난한 법정 공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암호화폐를 증권이라고 판단한 국내 판례는 없는 상황. 비슷한 재판이 먼저 진행된 미국 법정에서도 암호화폐의 증권성 여부에 대한 뚜렷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서울남부지방법원 형사합의14부는 자본시장법 위반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신현성 포트원글로벌 공동대표 등 8명의 2차 공판준비기일을 8월 28일 열었다. 신 대표 등 테라폼랩스 관계자들은 테라 코인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해 현실 경제에서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허위 홍보해 전 세계 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는 혐의를 받는다. 검찰은 테라폼랩스 관계자들이 챙긴 부당이익이 최소 4629억 원이라고 보고 있다.
재판부는 이날 "쟁점을 요약하면 증권성 여부, 공모·가담 여부, 테라 프로젝트 사업이 불가능했는지 여부 등"이라고 밝혔다. 테라·루나 폭락 사건은 검찰이 암호화폐를 증권이라고 보고 자본시장법을 적용해 기소한 첫 사례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부활시킨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의 1호 사건이기도 하다.
암호화폐의 증권성 여부는 형사 재판에서 처음 다뤄지는 쟁점이라 치열한 법리 다툼이 예상된다. 각 쟁점에 대한 공동피고인들의 입장마저 일치하지 않아 재판 장기화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재판부는 "피고인별로 입장이 다른 부분이 있다. 특히 공모·가담 여부에서 '(테라폼랩스 대표) 권도형이 알아서 했다' '(테라폼랩스 공동창업자) 신현성까지 관여했다' 등 입장이 다르다"고 밝혔다.
검찰은 암호화폐를 증권이라고 판단한 미국 법원 판결문을 추가 증거로 이날 제출했다. 암호화폐를 증권이라고 판단한 국내 판례는 없기 때문에 미국 판례로 재판부를 설득하기 위함이다.
검찰은 테라폼랩스가 자금 조달을 위해 루나 코인을 발행했고, 투자자는 루나 코인을 보유하면서 테라 프로젝트 성과에 따른 손익을 분배받았으므로 루나 코인은 금융투자상품(증권)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신 대표 측은 루나를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론 보상이 제공되지 않으므로 루나 투자자들이 사업 손익을 귀속받는다고 보기 어렵다고 반박한다.
검찰은 루나 코인의 증권성을 두고 펼쳐진 전초전에서 판정패했다. 법원은 검찰의 신 대표 재산에 대한 몰수보전 청구를 기각하면서 "루나는 금융투자상품(증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관련기사 [단독] 법원 "루나, 증권 아니다" 검찰의 신현성 재산 몰수보전 불발). 또 법원은 검찰의 신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두 차례 기각하면서 루나의 증권성 여부에 대해 "법리상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고가의 미술품을 공동소유할 수 있다며 암호화폐 피카 코인을 발행한 뒤 시세조종을 통해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혐의를 받는 피카프로젝트 공동대표 송 아무개 씨와 성 아무개 씨 재판에서도 증권성이 쟁점이 될 전망이다. 송 씨, 성 씨 등은 미술품 투자 성과를 허위 홍보하는 등 피카 코인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린 뒤 고가에 매도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검찰은 피카 코인 자체는 증권이 아니지만 코인 투자자들에게 발행한 보증서가 증권에 해당한다고 보고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송 씨 측 변호인은 9월 6일 남부지법에서 열린 1차 공판기일에서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공소사실 주요 부분의 법원 선례가 없다. (미술품 조각투자) 보증서를 투자계약증권에 해당한다고 봐서 기소가 된 최초의 사안"이라며 "법률적 검토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검찰 진술에서 사실관계는 인정했다. 법률적인 부분을 다퉜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도 암호화폐의 증권성에 관한 판결은 엇갈리고 있다. 뉴욕남부지방법원 아날리사 토레스 판사는 7월 13일 "(암호화폐) 리플이 개인에게 판매될 때는 증권이 아니"라고 약식판결했다. 판결 이후 리플 가격은 2배 가까이 폭등했다. 비트코인을 제외한 모든 암호화폐는 증권이라고 주장하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약식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반면 뉴욕남부지방법원 제드 레이코프 판사는 "테라·루나 코인은 증권"이라고 7월 31일 판단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사기 등 혐의로 제기한 소송을 기각해달라는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의 청구를 기각하면서다. 제드 레이코프 판사는 "권도형 대표 등 테라폼랩스 관계자들이 루나 코인 판매로 테라 생태계가 발전하고 이는 다시 루나 코인 가치 상승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주장에 구체적인 근거가 있다"고 밝혔다. 루나의 증권성 여부에 대한 본격적인 심리는 권 대표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본안 소송에서 이뤄지게 된다.
국내 법원이 암호화폐를 증권이라고 판단한 사례는 아직 없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민사소송에서 암호화폐는 증권이 아니라고 재판부가 판단한 사례는 두 건 확인됐다. 두 판례 모두 암호화폐 보유자들이 암호화폐 발행사의 사업 수익을 분배받기는 했지만 투자계약에 따른 권리는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암호화폐 보유자들의 핵심적인 투자 동기는 사업 수익 공유가 아닌 시세차익 취득이었다고 일축했다.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민사7단독은 2021년 9월 암호화폐 A 코인 투자자들이 발행사 대표 박 아무개 씨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박 씨 등은 암호화폐 거래소도 운영하면서 A 코인 보유자들에게 거래소 수익금 일부를 일정 비율에 따라 지급했다. 또한 A 코인 가격을 상승시키기 위해 거래소 수익금 일부로 A 코인을 매입한 뒤 이를 소각했다.
A 코인 투자자들은 박 씨 등이 암호화폐 거래소 회원 수를 부풀리는 등 허위 홍보로 투자자들을 모집한 뒤 시세차익을 거뒀다며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A 코인이 투자계약증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A 코인 발행사의 기망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은 인정했지만 자본시장법 위반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쌍방 항소로 2심이 진행됐지만 의정부지법 제2민사부는 2022년 10월 항소를 기각해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1심 재판부는 "일부 수익이 A 코인 투자자들에게 배당되기는 했지만 그러한 수익 분배는 A 코인 거래 활성화를 위해 부수적으로 제공하는 이익일 뿐 A 코인에 내재된 구체적인 계약상 권리라거나 본질적 기능이라고 볼 수 없다"며 "A 코인 거래의 가장 큰 동기는 A 코인 거래로 발생하는 시세차익 취득이며 이에 관하여 A 코인 보유자들 사이 이해관계가 상충한다"고 판시했다.
다만 민사소송에 앞서 A 코인 발행사 임원들은 사기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에 처해졌다. 회사 대표 박 씨는 2021년 4월 형사재판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박 씨 등을 기소한 검찰은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A 코인의 시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가격 상승을 통한 시세차익을 낼 수 있을 것처럼 피해자들을 기망하고 이에 속은 피해자들로 하여금 A 코인을 구매하게 함으로써 금원을 편취한 사실이 넉넉히 인정된다"며 "애초부터 이를 정상적으로 실행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유사 판례는 한 건 더 있다. 서울남부지법 민사7단독은 2020년 3월 암호화폐 B 투자자들이 발행사 C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암호화폐 B를 보유함으로써 수익을 분배받기는 하지만, 그러한 수익 분배는 발행사 C가 암호화폐 B의 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제공하는 이익일 뿐 암호화폐 B에 내재된 구체적인 계약상 권리라거나 본질적인 기능이라고 볼 수 없는 점, 암호화폐 자체 거래로 발생하는 시세차익 취득이 암호화폐 B 매수의 가장 큰 동기이고, 이에 관하여 투자자 사이에 이해관계가 상충한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남경식 기자 ng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