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사이드 룰’ 개정 지역방어 사실상 깨져
▲ 2007년부터 복수노조가 허용됨에 따라 이건희 회장(오른쪽)의 ‘무노조 삼성’ 전략이 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 ||
삼성그룹 내에 노동조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관할관청에 신고된 삼성 계열사 소속 노동조합도 10여 군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의 노조 활동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은 각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자체적인 노조 설립 시도가 있을 경우 사측 인사가 미리 관할관청에 노동조합 설립을 신청해 노조 설립을 막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한 사업장에 하나의 노조만이 허용돼온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자가 주체세력이 되는 노조 설립을 시도했던 노동자들은 삼성의 ‘유령 노조’ 앞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내년 초부터 복수노조가 허용됨에 따라 삼성 내 노동운동가들은 ‘기회’를 맞은 반면 ‘무노조 경영’을 과시해온 삼성 수뇌부 입장에선 ‘위기’를 맞은 셈이다. 이병철 창업회장으로부터 ‘노조 활동은 절대 안된다’는 경영철학을 전수받은 이건희 회장의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동안 삼성그룹 내에서 노동자들의 자체적인 노조 결성 움직임이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삼성그룹 측의 ‘적극적인 사전 차단 작업’과 압박 등 여러 ‘공작’들이 이를 좌절시켜 왔다. 그러나 복수노조 시대를 맞아 그동안 유령 노조 설립 신고서에 번번이 ‘선수’를 뺏겨 노조를 결성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자체적 노조 결성을 도모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삼성그룹이 이를 순순히 놔둘 리 만무하다. 삼성은 현재 복수노조 시대를 대비해 중간간부급 이상 직원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복수노조의 개념 알리기와 노동운동 전력이 있는 직원들에 대한 감시교육 등이 주를 이룬다고 전해진다.
삼성은 노조 설립을 최대한 저지하되 만약 노조가 설립되면 이를 ‘친사적’으로 만들어 관리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노조활동 분쇄를 위한 3단계 방안을 세워놓고 시행 중이다. 1단계는 전략적 처우 개선, 2단계는 노사 친목 관계 활성화, 그리고 마지막 3단계로 노사 화합 선언을 큰 그림으로 마련해 놓은 상태다.
대표적인 곳으로 삼성전자를 꼽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토요일 행사를 모두 없애버렸다. 원래 토요일에 사원 체육대회나 등산 혹은 단합대회를 자주 개최했으나 올 초부터 이를 모두 폐지해버린 것이다. 젊은 직원들이 많아지면서 주말을 회사일과 무관하게 여유롭게 보내려는 성향을 정책에 적극 반영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직원들이 ‘복수노조 시대에 대비한 사측의 전략’이라 수군거린다는 전언이다.
노사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려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현재 삼성전자에는 각 사업장별로 별도의 노사협의회 같은 기구가 설치돼 있다. 이 협의체는 사원 대표와 사측 대표가 만나 임금인상안에 대한 대강의 윤곽을 잡는 식의 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실상 ‘사측 의도대로 굴러가는 조직’이라 볼 수 있다. 이 협의체 간부를 지내는 직원들은 해외연수 기회 등 사측이 제공하는 편의를 다른 직원들에 비해 많이 누린다고 한다.
현재 삼성전자 내엔 복수노조 시대에 대한 대책을 연구하는 특수목적(T/F)팀이 설치돼 있다고 한다. 이 팀은 향후 2년간 운영될 계획이며 언제 발생할지 모를 노동자들의 자체 노조 설립에 대비한 단체교섭 시나리오도 연구 중이라고 한다. 이 팀의 최대목표는 내년 초에 공개적으로 ‘노사화합 선언’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 선언서에 자체 노조 설립 계획이 없다는 문구를 넣는 식으로 ‘무노조 경영’을 천명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삼성그룹 차원의 조직적인 노력에도 복수노조 시대를 대비한 삼성 노동자들의 자체적인 노력은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주로 삼성에 인수 합병된 법인들로 기존에 있던 노조 조직이 아직 남아서 재조직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삼성이 인수했던 사업장 중 가장 활발하게 노동조합 활동을 펼쳤던 곳은 제일병원(삼성제일병원)이다. 그러나 제일병원은 지난 3월 삼성으로부터 계열 분리됐고 제일병원 노조는 지난 5월 산별노조로 전환해 세를 확장했다. 이 계열 분리를 제일병원 노조가 다른 계열사 소속 노동운동 세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결정이었다는 결과론적 시각도 가능한 셈이다.
현재 삼성그룹 내에서 노동자 중심의 노조 설립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삼성 계열사 A 업체를 꼽을 수 있다. A 업체는 현재 노동부에 노조가 설립된 곳으로 신고돼 있다. 그러나 이는 삼성이 A 업체를 흡수합병하면서 기존에 있던 민주노총 산하 노조 지부를 없애버리고 나서 사측이 먼저 관청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낸 경우다. ‘유령 노조’인 셈이다.
그런데 기존 노조에서 활동했던 조합 집행부 출신 직원들이 상급단체에 개별적으로 조합원 가입을 해놓은 상태다. 사업장에서 자체적으로 노조를 설립한 뒤 상급단체에 지부로 가입하는 것이 보통의 산별노조 활동이지만 A 업체는 복수노조 금지 조항 때문에 자체 노조 설립을 하지 못한 직원들이 해당 상급단체에 개인 자격으로 가입을 한 것이다. 노동계에선 이를 ‘직가입’이라 부른다. 일각에선 이들이 제일병원 노조활동에 자극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A 업체에서 상급단체에 직가입한 직원들은 얼마 못 가서 사측에 발각됐고 결국 호된 질책을 받았다고 한다. 사측이 이들을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올려놓고 예의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내부 조직사업이 용이하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직가입한 직원들은 현재까지도 상급단체와 수시로 접촉하며 내일을 도모하고 있다. 내년 복수노조 허용과 동시에 자체적 노조 신고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삼성 계열사들 중 A 업체와 비슷한 식으로 노조 설립 가능성을 높이는 사업장이 여러 군데 있다고 전해진다.
노동계 인사들은 A 업체에서 신년 벽두에 노동자 주체의 노조 설립을 공표할 경우 삼성 계열사 전체에 산재한 노동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에버랜드 사건 수사로 인한 검찰소환이 가시화되고 있는 이건희 회장 입장에선 근심거리 하나가 더 늘어난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