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검도인 역할로 첫 스크린 주연…“호면 속 눈빛·숨소리만으로 감정 표현, 새로운 도전”
“사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권모술수 권민우’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죠(웃음). 그래서 그때 감독님한테 그랬어요. ‘만분의 일초, 지금 개봉하면 안 돼요?(웃음)’ 제가 관심받고 있을 때 작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지금 개봉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권민우란 이름도 잊히는 시기니까요. 제가 연기한 재우는 어차피 권민우가 아니기 때문에 더 색다른 모습으로 저를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한국 영화 최초로 검도를 소재로 한 영화 ‘만분의 일초’에서 주종혁은 검도 국가대표 선수를 뽑는 자리에 올라올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어린 시절 형을 잃은 트라우마로 고뇌하는 검도인 김재우 역을 맡았다. 함께 모인 국가대표 후보 선수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가 자신의 형을 죽인 황태수(문진승 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재우는 그를 향해 끊임없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복수의 목적을 찾지 못해 방황하게 된다. 재우의 이런 고저가 분명한 감정 변화는 대사나 행동이 아닌 그의 눈빛과 숨, 클로즈업된 온 얼굴로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숨소리가 너무 크게 울리다 보니 스크린으로 저를 볼 때면 단내가 풍길 것 같더라고요(웃음). 연기를 하다 제가 제 분에 못 이겨서 한숨을 쉴 때가 있는데 그러면 그 틈으로 재우의 감정이 빠져나가는 일도 많았어요. 그동안 쌓아왔던 감정이 숨 한 번에 무너지는 거죠. 또 제가 이해한 재우를 최대한 많이 표현하려고 했던 부분 중에 하나가, 재우가 가진 아픔과 상처들을 사실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단 것이었어요. ‘만분의 일초’ 세계 안에서의 사람들은 재우의 행동이 ‘금쪽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웃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재우의 감정선을 과거에서부터 따라가며 보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공감대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죠.”
검도를 소재로 한 영화다 보니 극 중 재우는 검도의 보호 장비인 호구를 착용한 채로 나오는 일이 잦았다. 특히 호면(얼굴 보호 장비)을 쓰면 관객들도 배우가 클로즈업되지 않는 이상 그 안의 표정을 가늠하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창살처럼 막혀 있는 얼굴 앞면 탓에 쓰고 있는 배우 역시 시야가 좁아져 연기할 때 거리감을 쉬이 잡을 수 없었다고. 그러나 동시에 호면 사이로 보이는 배우의 눈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되면서 관객들은 이 이야기에 더욱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저는 호면이란 도구가 재우를 가둬놓고 있는 그 감정 자체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얼굴 클로즈업을 반씩 잘라서 하면 호면의 그늘이 재우 얼굴에 그림자로 생기는 식인데, 그런 연출과 재우의 내면이 잘 어우러졌던 것 같아요. 한편으론 눈에 주목을 해야 하다 보니 대사가 아닌 눈으로 말해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기도 했죠. 분노, 억울함, 깨우침, 이런 감정을 눈으로 다 말해줘야 해서 신경을 정말 많이 썼어요(웃음).”
그런 재우의 태수를 향한 감정은 복잡하고 또 미묘하다. 어린 시절 사고로 추정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태수의 손에 친형이 목숨을 잃었고, 태수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검도 도장 사범인 아버지는 원망 없이 그를 검도인으로 키워낸다. 아버지가 가족을 배신했다고 믿은 재우는 모든 분노를 아버지에게 터뜨린 뒤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선언한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가족의 해체,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절연이 모두 태수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도장에서 그를 처음으로 맞닥뜨리면서 재우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분노’라는 단어로 뭉뚱그리기엔 다양한 색채와 점도를 가지고 있다. 그를 연기한 주종혁 역시 “태수에 대한 증오는 ‘이 사람이 싫다’라는 감정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여러 가지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있었을 거예요. 태수를 향한 감정에 물론 아버지를 향한 원망도 들어있었을 거고요. 그런 감정들이 모여서 태수를 향한 화살이 돼 날아가는 거죠. 태수에 대한 복수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단 그 복합적인 감정을 대사 없이 제 얼굴과 눈만 가지고 연기해야 하니 이게 잘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재우의 마음에 공감해주셔서, 그게 참 신기하고 좋더라고요(웃음).”
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모술수로 가득 찬 동료 변호사 권민우로 익숙한 대중들은 ‘만분의 일초’ 속 김재우의 모습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주종혁의 장기는 오히려 이런 류(?)의 캐릭터라고 한다. 남들보다 조금 가라앉아 있는, 잔잔하고 조용한 캐릭터로 작은 독립영화에서 활약해 온 그는 오히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권민우야말로 처음 연기해보는 성격의 캐릭터였다고. 작품의 인기에 힘입어 한동안 포털 사이트에서 자신의 이름과 권민우, 권모술수를 번갈아 가며 검색해 봤다며 웃음을 터뜨린 주종혁은 앞으로 어떤 새로운 수식어를 갖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권모술수’를 포함해서 이제 제 이름 앞에 연관 검색어, 수식어가 아무 것도 없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사실 제가 제 이름 검색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갑자기 ‘주종혁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제 이름에 수식어들이 마구 붙으면 놀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배우로서 꼭 가지고 싶은 수식어를 꼽는다면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해 나가는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도 대중들에게 친근한 느낌이었으면 더 좋겠고요. ‘주종혁 배우’라는 타이틀보단 그냥 ‘편안한 사람’으로 다가갈 수 있으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