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초 만드는 데 일주일’ 수익화 어려운 데다 미야자키 후계자 육성도 실패…안정적 경영기반 확보 목적
“한 사람이 짊어지기엔 지브리가 너무 큰 존재가 됐다.” 지난 9월 21일, 지브리 사장이자 애니메이션 제작자 스즈키 도시오는 도쿄 지브리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영권을 닛테레에 넘기기로 했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약 1시간의 기자회견에서 드러난 것은 지브리가 안고 온 고뇌였다”고 한다.
지브리의 탄생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등 주로 TV 애니메이션을 담당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가 중심이 돼 “예산과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고 고품질 작품을 만들어 보자”며 발족했다. 특유의 따뜻한 감성과 압도적인 작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지브리 작품은 폭넓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02년 개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고, 예술성까지 인정받으며 ‘애니메이션 명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미야자키 감독을 선두로 히트작은 속속 탄생했으나 ‘뒤를 이을 인재가 없다’는 것이 언제나 숙제였다. 스즈키 사장은 회견에서 “후계자 육성에 모조리 실패했다”고 밝혔다. “후계자로서 이름이 오른 것은 적어도 6명이었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이 ‘귀를 기울이면’의 감독을 맡아 장래가 촉망됐던 곤도 요시후미였다. 안타깝게도 1998년 47세의 나이로 요절해 지브리의 새로운 시대를 열지 못했다.
기대했던 인재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에반게리온’ 시리즈로 알려진 안노 히데아키, ‘이 세상의 한구석에’의 가타부치 스나오, ‘너의 이름은’의 작화 감독 안도 마사시 등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호소다 마모루도 한때 지브리에 몸담았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애니메이션 연구가 쓰가타 노부유키는 “지브리가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터를 많이 배출하긴 했으나 인재가 정착하진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미야자키 감독이 ‘지독한 완벽주의자’라서 제자를 길러내지 못한다”는 견해를 내비치는 관계자도 있다.
일각에서는 “미야자키 감독의 아들이자 ‘게드전기’의 감독 고로에게 지브리를 승계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미야자키라는 이름으로 지브리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며 미야자키 감독이 반대했고, 고로 본인도 “회사 장래는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며 마다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브리가 닛테레의 자회사가 되기로 한 이유는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데다, 안정적인 경영기반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잘 알려진 대로, 지브리의 작품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 가령 미야자키 감독의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손으로 그리는 고전적인 방법을 고수해 제작에만 무려 7년이 걸렸다. 과거 인터뷰에서 스즈키 도시오 사장은 “한 편의 영화 제작에 400~500명의 스태프가 관여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물론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브리에서 5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만들려면 일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지브리가 2시간짜리 영화를 만들려면 최소 2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사이 신작 상영이 없으면 자금만 빠져나갈 뿐이다. 또 신작이 나와도 이익이 나기 어려운 구조다. 2013년 개봉한 미야자키 감독의 ‘바람이 분다’는 흥행 수입이 120억 엔(약 1075억 원)이었지만, 제작비가 많이 들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일본 매체 주간다이아몬드는 “미야자키 감독이 납득할 만한 작품을 만들려면 인력과 시간,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며 “손익분기점을 넘기 위해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300억 엔 이상의 메가히트작을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야자키 감독은 82세, 스즈키 사장도 75세가 됐다. 지브리가 이대로의 체제를 이어가기는 아무래도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지브리 팬들은 이번 결단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닛케이마케팅저널이 설문 조사한 결과, 대기업의 자회사가 된 것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는다’가 52%로 ‘기대한다(40%)’를 웃돌았다. “애니메이션 장인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지브리가 경제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대기업 산하에서 히트작을 계속 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과거의 명성에 비해 충성도는 약해진 모습이다. “지브리 작품을 보는 빈도가 줄었다”는 24%인 반면 “늘었다”는 3%에 그쳤다. 닛케이마케팅저널은 “일본 영화 흥행 수입 10위 안에 지브리 작품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작품이 3개나 포함돼 있지만, 모두 200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이라고 짚었다. 실제로 2023년 개봉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경우 관객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며, 흥행 수입 100억 엔을 넘지 못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지브리는 장편 애니메이션 위주에서 벗어나 짧은 작품 제작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그중 하나가 TV 애니메이션이다. 장편 영화는 개봉할 때까지 들어오는 수입이 없지만, TV 애니메이션은 정기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다. 최근 일본 TV 방송사들도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방안을 잇달아 강화 중이다. 특히 해외시장 확대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후지TV는 중국 동영상 유통업체인 빌리빌리(Bilibili)와 제휴해 애니메이션 공동제작에 나섰으며, TV도쿄는 동남아시아 시장에 자사 애니메이션 공급을 늘릴 방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브리는 스트리밍은커녕 TV 방송조차 원하지 않았다. 작품을 영화관에서 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지브리도 결국 2020년 넷플릭스와 계약을 맺고 일본과 미국, 캐나다를 제외한 190개국에 배포를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닛테레가 지브리를 인수하면서 “같은 그룹 내 OTT 플랫폼 훌루(Hulu)에서 지브리 작품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냐”는 기대감이 높다.
인수를 계기로 지브리의 글로벌 진출과 지식재산권(IP)의 상품화 및 게임화, 이벤트 개최 등 다중 전개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기업 품에 안긴 지브리는 과연 작품성과 수익성을 양립시킬 수 있을까. 설립 이래 가장 큰 기로에 서 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