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지는 노사관계 상생이냐 투쟁이냐
▲ 내년부터 바뀌는 노동법이 노사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은 이구택 회장과 포스코 빌딩. | ||
창립 이래 군인 출신이었던 박태준씨가 경영을 맡았던 포스코는 80년대 중반 ‘서울의 봄’ 이후 다른 산업 현장이 노조 투쟁으로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도 무풍지대로 남아있었다. 물론 포스코에도 노조는 있다. 하지만 다른 사업장과 같은 노동조합 활동을 벌이진 않고 있다. 사실상 ‘휴면노조’인 셈이다. 얼마 전 현대차 노조의 산별 전환을 지켜본 재계와 노동계 인사들은 복수노조 시대를 맞이한 공룡 기업 포스코에서 새로운 노동조합이 설립될 가능성에 안테나 주파수를 맞춰둔 상태다.
지난 1988년 설립된 포스코 노동조합은 아직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20명 안팎의 규모로 축소된 상태다. 포스코 측은 23명이라 주장하고 포스코 내 노동운동 세력은 18명이라고 반박한다. 어쨌든 전체 직원 1만 9000명 규모의 거대 사업장에서 포스코 노조는 ‘이름’만 유지하고 있을 뿐 사실상 노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관계자들은 포스코 노조에 대해 “노조 활동을 한다는 이야길 들어보지 못했다”고 밝힌다.
포스코 관계자에 따르면 “(포스코) 노동조합은 사측과 노경(勞經)협의회를 통해 매년 단체교섭을 한다”며 노조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포스코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노정추) 측은 “상징적인 활동일 뿐”이라 일축한다. ‘20명도 안 되는 조합의 집행부가 어떻게 1만 9000명 노동자 권익을 대변할 수 있냐’는 논리를 바탕으로 현 조합이 사실상 사측 의도대로 굴러가는 조직이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년 복수노조 시대를 맞이해 포스코 노동자 권익 보호 차원에서 투쟁적 노동운동을 전개할 새 노동조합 탄생이 이뤄질까. 이는 사측의 방해 여부를 떠나 노동운동을 벌이려는 직원들의 자발적 의지가 모여야 가능한 일이다. 포스코 측은 “우리 회사엔 (투쟁적) 노동조합 활동이 사실상 필요 없다”고 밝힌다. 노동자의 권익 향상이 노조의 주 활동 목적이지만 포스코는 이미 ‘직원 처우나 복리후생 등에서 선망의 기업이 됐기 때문에 투쟁적 노조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는 직원들이 많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포스코 측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재계에선 포스코가 복수노조 시대에 대비한 집안단속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선 포스코 내 노조 관련 간부교육이 잦아지고 노조 설립 주체가 될 만한 인사들에 대한 사측의 눈초리도 더욱 날카로워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노조 설립 대응방안과 단체협상 로드맵 마련을 위해 유명 로펌에 용역을 줬다는 소문도 이미 재계에 파다한 상태다.
이에 대해 포스코 측은 “조직관리는 평소에도 해오던 것이다. 법적으로 복수노조가 허용되는데 그것을 막기 위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며 일축한다. 포스코 관계자는 “포스코 직원들의 평균 근속 년수가 19년이다. 그만큼 오래 다니기 좋은 직장이란 뜻이다. 보통의 노조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얻어내고자 하는 모든 복지와 처우 개선이 포스코에선 이미 다 이뤄진 상태”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재계와 노동계의 다수 인사들은 포스코 내 노동자가 주체로 서는 노조 설립 가능성에 여전히 주목한다. 노동계에 따르면 현재 휴면노조나 다름없는 포스코 노조의 구성원 20여 명 안에 포스코 내 투쟁적 노동조합 활동을 도모하는 ‘노정추’ 인사들이 몇 명 포함돼 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포스코에서 해직됐으며 현재 ‘노정추’ 활동을 이끌고 있는 이건기 씨는 “노조활동 정상화를 위한 모임에 참여하는 포스코 현 직원들이 30~40명에 이르며 향후 민주노총과 연계해 노동자 권익 중심의 노동운동을 해나갈 것”이라 밝힌다. 이 씨는 “노조 설립 초기엔 다른 사업장과 같은 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 활동이 이뤄졌지만 지난 1990년대 이후부터 사측이 노조에 적극 가담하는 직원들에 대해 압박을 가했다. 병역특례자들을 입대시키겠다고 윽박지른다거나 가족에게 연락해 회유를 한 적도 있다. 주택자금 대출 불허, 다른 사업장으로의 전출 등의 사례도 본 적이 있다. 당시 사측에 기세가 눌려 그동안 사람들이 나서려 하지 않았지만 복수노조 시대가 되면 달라질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포스코 관계자는 “(노정추는) 사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모임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노정추) 핵심부엔 정치권 진출 목적을 가진 인사들도 있다”고 밝혔다.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는 거대 기업 포스코를 흔들어서 노조 설립을 통해 뭔가 얻어내려 하는 외부세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한편 포항 건설노조원들의 포스코 본사 점거 사태가 포스코 내 노동운동 세력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 보는 시각도 있다. 대규모 점거 농성을 벌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포스코 내 잠자고 있던 노동운동 세력을 깨우는 계기가 됐다는 관측이다. 그러나 포스코 관계자는 “포스코 소속이 아닌 포스코로부터 하청 받은 업체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연대해 포스코 사옥을 습격한 것이므로 포스코 사내 문제라 볼 수 없다. 포스코 직원들은 외부인이 점거한 사옥을 바라보며 인근의 다른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불편함을 겪었다”고 전한다. 집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습격자’들로부터 감흥을 받았을 리 만무하다는 주장이다.
포스코 측의 자신감에도 현재 노동운동 세력은 “그동안 무서워서 나서지 못했을 뿐이지 직원들 80% 이상이 새 노조 설립에 공감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포스코 측은 “현재 포스코의 복지 수준에 대부분의 직원이 만족해하고 있으며 노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직원들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재계와 노동계 인사들은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새해까지 남은 5개월 동안 포스코 내부의 물밑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이나 포스코 등 국내 노조활동 무풍지대에 있던 기업들이 산별노조전환과 복수노조라는 태풍권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