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 같이 가 길이 돼” “86운동권 청산” 등 한동훈 핵심 발언 민경우의 시민단체 ‘길’과 비슷해 눈길
2023년 12월 1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하면서 기자들과 나눈 문답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정치인으로서 데뷔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서 ‘정치경험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한 위원장은 이렇게 답한다.
“일반론이니까 일반적인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거죠.”
일주일 후인 12월 26일, 한동훈 위원장은 비대위원장직 수락연설 마지막에 “함께 가면 길이 됩니다. 우리 한번 같이 가봅시다”라고 다시 강조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이 함께 가면 길이 된다’가 한 위원장의 정치철학을 상징하는 말처럼 인식됐다. 국민의힘은 ‘함께 가면 길이 됩니다’ 문구를 이용해 뒷걸개(백드롭)을 만들고 길거리에 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이는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의 유명한 소설 문구를 인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직전 이 문장을 대대적으로 사용한 곳이 있었다. ‘시민단체 길’이다. 시민단체 길은 2023년 10월쯤 설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시민단체 길의 유튜브 채널을 보면 화면 맨 위 상단 대문배너에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루쉰의 원문은 번역체라 인용하는 이마다 조금씩 다른데 한 위원장 발언과는 토씨까지 같다. 이 문구는 유튜브 채널 시작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홈페이지 대문배너 문구를 보면 총 3번 등장하는 ‘길’ 단어를 다른 단어보다 굵고 크게 표시하고 있다. 시민단체의 명칭을 ‘길’로 정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시민단체 길과 한동훈 위원장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민단체 길 홈페이지 소개글을 보면 “86세대의 30년 정치 독점을 청산하고 운동권의 낡은 생각 대신 바꾸니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4050세대의 정치 주류로의 등장을 주장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한동훈 비대위원장 수락연설 중 “민주당을 숙주 삼아 수십 년간 386이 486·586·686 되도록 썼던 영수증 또 내밀며 대대손손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며 “이는 우리가 운동권 특권정치를 대체할 실력과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라고 공동체와 동료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고 발언과 맥락을 같이 한다.
시민단체 길의 상임대표는 민경우 전 비대위원이다. 한 위원장은 민 전 비대위원에 대해 “기득권과 싸우려다 누구보다 견고한 기득권층으로 변해버린 운동권의 특권정치 청산에 앞장서 주실 분”이라며 “386·486·586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동료시민을 위한 정치를 바로 세워주시리라 기대한다”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민경우 전 비대위원은 비대위 합류 발표와 동시에 잇단 구설에 휩싸였다. 가장 먼저 ‘노인 비하발언’이 문제가 됐다. 2023년 10월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지금 가장 최대 비극은 노인네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이라며 “빨리빨리 돌아가셔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 알려졌다.
다른 유튜브 방송에서는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에 대해 “우수한 제국 청년들이 해외 식민지를 개척했다”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한반도를 경영하려는 거대한 구상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진출했던 일본 청년들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막무가내로 개긴다. 이런 것도 다양성이라고 인정해야 되느냐”고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언사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논란이 되자, 민 전 비대위원은 공식 임명된 지 하루 만인 12월 30일 사퇴했다.
한동훈 위원장은 민경우 전 비대위원과 거리두기에 나섰다. 한 위원장은 1월 1일 신년인사회를 마친 뒤 민 전 비대위원 논란에 대해 “분명 부적절한 발언이 있었고, 저도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발언”이라며 “앞으로 더 언행에 신중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가 일각에선 한동훈 위원장이 비대위원장 추대 전부터 민 전 비대위원과 교류하며 조언이 오간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앞서 2023년 12월 21일 법무부 장관 이임식을 마치고 기자들을 만난 한 비대위원장은 ‘비대위 인선 위해 접촉한 사람 있냐’는 질문에 “특별히 어떤 분과 접촉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비대위 인선 관련해 누구와 접촉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틀 전(12월 19일)에 민경우 전 비대위원이 대표로 있는 시민단체 길과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가면 길이 된다’는 말을 같이 썼다. 이어 비대위원장직 수락연설문에서도 ‘86운동권 세력의 청산’을 강조했다. 과연 의견조율 없이 우연일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민 전 비대위원 자진 사퇴로 한 비대위원장과 국민의힘은 선긋기에 나섰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미 물밑에서 조언을 주고받았다고 한다면, 비대위원 사퇴 이후에도 발언 및 당의 운영방향에 대해 서로 연락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정부여당 비대위원장이 ‘극우’적 사고에 사로잡힌 인물을 조언그룹에 두는 것이 맞느냐”고 꼬집었다.
이를 의식한 듯 시민단체 길과 민경우 전 비대위원 등은 한 위원장과의 연관성 흔적 지우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1월 3일 기준 시민단체 길의 유튜브 채널을 보면 상단에 있던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대문배너를 삭제했다. 또한 길 홈페이지는 전날 오후부터 ‘시스템 점검 중’이라며 열리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 길 관계자는 “홈페이지 글을 왜곡해 활용하려 한다는 제보가 다수 있어 홈페이지를 최근 차단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 “이 문구는 외국의 어느 시인지, 소설을 인용한 것으로 안다”며 “한 위원장과 민 전 비대위원의 관계성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한 위원장은 민 전 비대위원을 그 이전에 몰랐다고 했다. 임명식을 하는 날 처음 봤다”고 반박했다. 시민단체 길과 한 위원장이 공교롭게도 같은 문구를 사용했다는 것, 또 일면식도 없는 인물을 비대위원으로 임명했다는 부분 등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