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참패’ 이어지면서 제작 편수 눈에 띄게 감소…대형 배급사·OTT마저 투자 줄이는 분위기
최근 만난 영화 제작업계 관계자 A 씨 말이다. A 씨는 2023년이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한 해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나뿐만이 아니다. 최근 영화, 드라마 업계 사람들 전부 죽는 소리가 나온다”고 토로했다. 한국을 ‘콘텐츠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해준 영화·드라마 업계가 앓는 이유를 짚어봤다.
2019년 한국 영화 위기론이 대두된 건 150억 원 이상을 투입한 영화 3편 모두 퀄리티와 흥행 이 기대를 밑돌면서였다. 당시 송강호 주연의 ‘마약왕’, ‘과속스캔들’ ‘써니’로 이름을 알린 강형철 감독의 ‘스윙키즈’, 하정우 주연의 ‘PMC: 더 벙커’ 등이 흥행과 재미를 모두 놓쳤다. 여기에 역시 150억 원을 들인 ‘자전차왕 엄복동’도 쪽박을 찼다. 이 4편 모두 150억 원가량 투입된 소위 ‘텐트폴’ 영화였다.
텐트폴은 그해 배급사 수입을 책임지는 성수기 대작 영화를 뜻하는 영화계 용어다. ‘스윙키즈’는 NEW, ‘마약왕’은 쇼박스, ‘PMC: 더 벙커’는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했다. 세 영화는 대략 400만 관객에서 손익분기점이 형성됐으나, 셋 모두 200만 관객조차 넘지 못했다. 텐트폴 영화가 나란히 참패하면서 한국 영화 완성도를 둘러싼 위기론이 고조됐다. 콘텐츠 질적 수준이 점점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다.
물론 2019년 흥행에 재미를 못 본 영화도 많지만 반대로 큰돈을 들이고 흥행한 영화도 많다. ‘공작’ ‘신과 함께’ ‘1987’ ‘극한직업’ ‘기생충’ 등 평단과 흥행 모두 잡은 쟁쟁한 영화도 꽤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당시 위기론은 일종의 ‘경고’나 자성의 목소리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짜 위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병이 극장을 말 그대로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 업계 제작 산업 측면에서 볼 때 받은 타격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구세주처럼 등장한 OTT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영화 제작업계 관계자 B 씨는 “영화 제작을 하던 사람들이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도 만들기 시작했다. 영화와 드라마 경계가 모호해지는 면도 있었다. 영화로 짧게 끝낼 얘기를 살을 입혀 조금 더 길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B 씨는 “영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등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이 만든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적인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오징어 게임은 OTT 드라마에 영화감독이 진출하는 바람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영화 ‘범죄와의 전쟁’ 등으로 유명한 윤종빈 감독이 넷플릭스에서 ‘수리남’을 만들었다. 디즈니 플러스(+)에서는 ‘모비딕’ ‘특별시민’을 만든 박인제 감독이 ‘무빙’을,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을 연출한 강윤성 감독이 ‘카지노’를 연출했다. 영화인이 일할 공간이 글로벌 OTT를 타고 좀 더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넷플릭스, 디즈니+ 외에도 국내 OTT ‘웨이브’ ‘티빙’ ‘쿠팡플레이’ ‘왓챠’까지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 한국 영화 제작 인력이 일할 공간이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영화인들은 팬데믹만 끝나면 원래 하던 영화 제작과 함께 OTT 작품까지 할 일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팬데믹이 끝나갈 때쯤부터 예상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이 극단적으로 줄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OTT도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줄이기 시작했다.
영화인들이 영화 제작이 줄었다는 걸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건 2022년부터다. 그때부터 한국 영화 참패가 이어졌고, 영화관을 찾는 관객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사실 한국인은 영화관을 매우 좋아했다. 1년에 한 명당 영화 4편을 극장에서 봤다. 한 해 극장을 찾는 관객이 2억 명을 돌파하는 시기가 꽤 오래 지속됐다.
2019년 디즈니와 마블 영화가 최전성기일 때 역대 최다인 한 해 2억 2000만 명이 극장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코로나19 유행 이후인 2020년에는 약 5952명, 2021년엔 약 6053만 명이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계에서도 재앙 같은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부진은 계속됐다. 조금씩 엔데믹(Endemic·감염병의 풍토병화) 분위기가 나타나던 2022년은 영화 관객 수 약 1억 1280만 명을 기록했지만 여전히 전성기였던 2019년의 49% 정도 수치에 불과했다. 2023년은 약 1억 2513만 명으로 2022년보다 늘긴 했지만 2019년을 따라가기엔 한참 부족한 수치였다. 특히 2022년, 2023년 한국 영화계는 참패의 연속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개봉을 못하고 묵혀 있던 작품들이 세상에 나왔지만 평단과 흥행 어느 쪽도 잡지 못했다. 2022년 개봉한 ‘비상선언’은 이병헌, 송강호, 전도연을 투입하고 흥행제조기였던 한재림 감독이 연출했으나 참패했다. ‘비상선언’은 손익분기점이 관객 500만 명으로 추산됐지만 200만 명에 그쳤다. 김남길, 손예진 투톱으로 860만 관객을 동원한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후속작 ‘해적: 도깨비 깃발’은 손익분기점 450만 명을 모아야 했던 대작이지만 130만 명 동원에 그치며 역시 실패했다.
2022년 기대작에는 ‘외계+인’ 1부도 있었다.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최동훈 감독이 연출했고 초호화 캐스팅으로 유명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외계+인’ 1부는 손익분기점이 무려 730만 명에 달하는 대작이었지만 동원 관객수 150만 명에 그치면서 ‘참사’에 가까운 결과를 받아들였다. ‘외계+인’은 2부 역시 손익분기점 700만 명이라고 알려졌다. 1부가 참패했는데, 2부가 성공하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정설이다. ‘외계+인’이 제2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불리는 이유다.
2023년에도 참패는 계속됐다. 임순례 감독이 연출하고 황정민, 현빈을 투입한 ‘교섭’은 손익분기점 350만 명이었지만 동원 관객 170만 명에 그쳤다. ‘독전’을 연출한 이해영 감독 작품인 ‘유령’은 손익분기점 330만 명인 대작이었지만 동원 관객 63만 명에 그쳤다. 특히 ‘유령’은 흥행 외에도 관객 평가에서 혹평이 이어지기도 했다. ‘신과 함께’ 시리즈 김용화 감독이 연출하고 설경구, 도경수가 주연한 ‘더 문’은 제작비 280억 원이 투입돼 손익분기점이 무려 640만 명이었지만 관객 수 50만 명을 겨우 넘기며 막을 내렸다.
물론 이 시기 망한 영화만 있던 건 아니다. 이제는 한국 영화 구원투수가 된 ‘범죄도시’ 2편과 3편이 관객 1000만 명을 훌쩍 넘기는 대성공을 거뒀다. 무려 1700만 명 관객을 동원한 명량 후속작 ‘한산: 용의 출현’은 손익 분기점이던 600만 명을 넘긴 관객 720만 명을 기록했다. 흥행 측면에서는 손익분기점 350만 명이었던 ‘공조2’가 관객 수 약 700만 명을 기록하며 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외 ‘헌트’ ‘올빼미’ ‘마녀’ ‘헤어질 결심’ 등도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이렇게 2022년에 이어 2023년까지 한국 영화 부진은 계속됐다. 2023년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단 7편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2023년 연말 그나마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을 넘기며 체면치례하게 해줬다. 특히 2023년 ‘범죄도시3’가 개봉하기 전까지 2022년 11월 개봉한 ‘올빼미’ 이후 약 반년 동안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영화가 단 1편도 없을 정도로 부진했다.
이런 결과가 지속됐던 탓인지 2023년이 되면서 영화 제작 편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고 한다. 앞서 영화 업계 관계자 A 씨는 “고금리 영향으로 돈이 줄기도 했고, 코로나19 이후에도 흥행작은 몇 편 되지 않지만, 참패는 계속됐다. 특히 한국 영화가 혹평에 시달리면서 ‘높아진 티켓값을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 것 같다”고 분석했다.
영화업계 관계자 C 씨는 “코로나19 전 흔히 데이트하기 전 영화 보고, 밥 먹던 습관이 완전히 사라졌다. 영화 티켓 값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이게 더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2023년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다시 극장가 관객수 2억 돌파는 어려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체념하기도 했다. C 씨는 “업무 특성상 거의 모든 한국 영화를 다 보는데, 나쁜 것만 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았던 영화도 예전만큼 흥행은 하지 못하더라”라고 덧붙였다.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2024년 대형 투자배급사가 투자할 영화가 반토막 날 것’이란 소문이 돈다고 한다. 앞서 영화 업계 관계자 B 씨는 “최근 시나리오를 제대로 보겠다는 투자배급사가 없다. 정말 흥행 보증 감독, 유명 배우가 아니면 투자 진행 자체가 안되는 상황이다”라면서 “2023년 ‘달짝지근해’, ‘30일’ 등이 흥행하면서 50억 원 이하 비교적 저예산 상업영화 정도만 가뭄에 콩 나듯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소문에 대해 2023년 10월 6일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구창근 CJ ENM 대표는 “최근 ‘CJ가 영화 투자를 그만둔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양질의 영화가 세상에 나오도록 건강한 투자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 CJ ENM의 중요한 사명이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구창근 대표는 시장 수익률과 위험이 달라진 만큼, 변화된 시장에 적합한 투자 모델을 구축하고 새로운 협업 방식을 시도해 양질의 영화가 시장에 나올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 얘기에 대해 영화인들은 ‘투자를 그만두진 않겠지만, 줄이는 건 기정사실로 안다’고 입을 모았다. 영화 업계에서는 2022년 CJ ENM이 기존 3개였던 영화 투자팀을 1개로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전해진다. CJ ENM 측은 이 소식 진위 여부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는 않았다.
영화 업계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을 때, 영화인들이 믿었던 OTT조차 조금씩 투자를 줄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투자를 받아 제작비를 집행하던 국내 OTT 회사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발 금리 인상과 맞물려 투자를 받기 힘들어진 게 결정적이었다.
특히 국내 OTT 회사인 웨이브, 티빙, 왓챠가 오리지널 콘텐츠 투자를 극단적으로 줄였다. 이들 회사들이 엄청난 영업 적자를 맞으면서 거액이 드는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부터 중단했기 때문이다. 웨이브의 영업손실은 2021년 558억 원, 2022년 1213억 원, 티빙 영업손실은 2021년 762억 원, 2022년 1191억 원으로 양사 모두 영업손실 규모가 1000억 원을 넘긴 상태다.
현재 외산 OTT가 한국 영화인의 마지막 희망이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다만 넷플릭스, 디즈니+ 모두 작년 대비 제작편수를 동결하는 수준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콘텐츠 성적 부진으로 한국 콘텐츠 팀이 해고되고 국내 제작 철수 소문까지 돌았던 디즈니+가 ‘무빙’ 성공으로 인해 한국에 지속해서 투자할 뜻을 밝혔다는 점이다. 디즈니코리아 측은 ‘무빙’ 시즌2 제작 의지가 확고하다고 전해졌다. 여기에 지난 연말 디즈니+가 방영한 ‘비질란테’까지 흥행에 성공하면서 영화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됐다.
2024년 한국 영화 업계는 어떨까. 대부분 영화인들은 반등이 어려울 것이라는 반응이다. C 씨는 “인건비가 오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제작비도 끝없이 오르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 제작 업계와 영화관 운영비 모두 슬림화해서 손익분기점이나 지출을 일단 낮춰야 할 것 같다. 티켓 값 영향도 커서 예전처럼 적당히 재밌으면 200만 명은 동원하던 세상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말했다. A 씨는 “2024년에는 영화 제작 인력이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계 봄은 아직 멀리 있는 듯하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