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 출연과 SBS 매각 모두 방어 성공…에코비트 공동매각 논의 ‘승부수’ 통했나
태영건설이 지난해 12월 28일 제출한 자구안을 놓고 채권단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월 4일 ‘남의 뼈를 깎는’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이복현 원장이 대안을 요구한 시한인 주말(1월 6~7일)은 물론 1월 8일까지도 태영그룹의 입장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이복현 원장은 1월 9일 오전 금융지주 회장들을 만나 태영건설 사태에 대한 시장 우려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이 원장은 “워크아웃 과정에서 수분양자나 협력업체가 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고, 시장 안정성·건전성이 확고히 유지되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개시 가능성을 높이는 발언으로 해석했다.
동시에 윤세영 태영그룹 창업회장이 나서 대안을 공표했다. 태영그룹은 당초 약속한 △태영건설에 1549억 원 지원 △에코비트 지분매각 △블루원 담보제공 및 매각 △평택싸이로 담보제공에 ‘SBS미디어넷 매각’을 보탰다. 일각에서 요구한 총수 일가의 사재 출연은 포함되지 않았다.
SBS미디어넷은 SBS스포츠, SBS골프, SBS비즈 등의 케이블방송을 제공하는 국내 3위 복수채널사용사업자(MPP)다. SBS미디어넷은 2022년 매출 1700억 원, 영업이익 126억 원을 기록한 우량기업이다. MPP는 별다른 소유규제가 없어 시장가치가 2000억~3000억 원을 웃돌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와 채권단은 태영그룹의 워크아웃 신청을 수용했다. 사재 출연 내용이 담기지 않았음에도 워크아웃을 수용한 것에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결정적인 승부처는 에코비트였다. TY홀딩스는 지난해 초 에코비트 지분 50%를 담보로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로부터 4000억 원을 빌렸다. TY홀딩스의 상환이 불투명해지면 KKR은 담보물을 몰취할 수 있다. 에코비트는 기업가치가 2조~3조 원으로 추정되는 회사다. 에코비트 지분 50%도 1조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셈이다. 즉, TY홀딩스가 KKR에 자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KKR로서는 1조 원 이상의 가치를 가진 담보물을 4000억 원에 챙길 수 있다.
그러나 KKR은 몰취 대신 에코비트 지분을 태영그룹과 공동매각하기로 했다. 이는 철저히 이해득실을 따진 판단으로 관측된다. 몰취를 했다가 정부의 반대로 에코비트 기업공개(IPO·상장)가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코비트의 IPO가 늦어지면 투자 수익 실현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KKR은 공동매각 조건으로 태영건설의 워크아웃을 명문화했다. 워크아웃이 무산되면 몰취에 나서겠다는 내용이었다.
태영그룹은 SBS 매각도 조건부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채권단 사이에서는 태영그룹에 SBS 매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TY홀딩스는 현재 SBS 지분 36.92%를 가진 최대주주다. 하지만 태영그룹은 SBS 매각에 끝내 확답을 주지 않았다. 윤세영 창업회장은 지난 1월 9일 기자회견에서 “필요하다면 TY홀딩스와 SBS 보유 지분도 담보로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SBS 매각 계획이 없음을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이는 태영그룹의 막판 ‘히든카드’가 역할을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태영그룹은 지난해 말 최금락 법무법인 광장 고문을 태영그룹 부회장으로 영입했다. 최 부회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냈다. 공교롭게도 이명박 정부 시절 주요 인사들은 현 정부에서 요직에 재기용됐다. 최금락 부회장은 SBS 기자 출신으로 태영그룹과의 인연도 깊다.
태영그룹은 굳이 SBS 지분을 담보로 내놓지 않더라도 정부에 SBS 운명이 달렸다는 점을 강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은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신청 후 ‘물리적 시간 부족’을 이유로 지상파 방송사 재허가 의결을 보류했다. 방송법에 따라 지상파 방송사가 재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심사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기준 가운데 하나가 재정 및 기술적 능력이다. TY홀딩스가 부실화된 태영건설을 섣불리 ‘꼬리자르기’ 하면 차기 정부가 SBS의 방송사업 재허가를 거부할 빌미가 될 수 있다. 태영건설에 이어 SBS까지 잃게 되면 태영그룹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다만 태영그룹으로서도 안심할 수만은 없다. 에코비트 매각 등 자구안 이행 후에도 태영그룹 유동성이 개선되지 않으면 SBS 지분도 시장에 나올 수밖에 없다. 태영그룹이 이번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SBS 지분도 사수하기 어려워진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