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 챙기려는 기만전술 가능성 높아…자금 문제 탓 대남공작 축소 움직임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개정 필요성을 언급한 대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북한 헌법)’ 제9조다. 북한 헌법 제9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반부에서 인민정권을 강화하고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을 힘 있게 벌려 사회주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원칙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내용이다.
김정은은 1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화국(북한)은 대한민국이 화해와 통일의 대상이며, 동족이라는 현실모순적인 기성 개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철저한 타국으로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제한 이상, 주권행사 영역을 정확히 규정짓기 위한 법률적 대책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하도록 교육교양 사업을 강화한다는 것을 해당 조문에 명기하는 것이 옳다.”
김정은은 “헌법에 있는 ‘북반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이 이제는 삭제돼야 한다”면서 “이런 문제들을 반영해 공화국 헌법이 개정돼야 하고, 다음번 최고인민회의에서 심의돼야 한다”고 했다. 사실상 헌법 개정을 콕 집어 지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두고 김정은이 완연한 전쟁 준비 스탠스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는 해석이 잇따르고 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냈던 미국 국무부 북핵특보 출신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명예교수는 최근 외교안보 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를 통해 “2024년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동맹을 돕기 위해 개입하는 것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북한이 핵무기 사용을 결정하는 사안이 가능하다”고 봤다. 핵전쟁 발발 가능성을 경고한 셈이다.
복수 대북 소식통은 “강경 발언에 이어 헌법 개정까지 지시한 김정은 행보는 한국이나 미국을 상대로 한 맞춤형 기만전술일 가능성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전직 정보 당국 관계자는 “일반 한국 국민 입장에서 북한이 헌법에서 ‘통일’ 관련 내용을 삭제한다고 하면, 엄청난 일처럼 느낄 수 있다”면서 “그러나 북한 헌법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 헌법은 김정은이 고치라고 지시하면 고칠 수 있다. 주머니 속 물건 꺼냈다 넣듯이 쉽게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면서 “북한은 법보다 당이 위”라고 했다. 그는 “북한이 구상하고 있는 국가 지향방향은 헌법이 아니라 조선노동당 당규에 담겨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국가보다 ‘김일성 장군 노래’를 더 많이 부르는 것처럼 북한 헌법 위엔 조선노동당 당규가 군림하고 있다. 조선노동당 당규는 김일성주의와 김정일주의로 점철된 내용이다. 통일 관련 내용과 관련해 김정은이 헌법을 고친다고 하지만, 당규를 개정한다는 말은 아직 한 적이 없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대를 이어 남긴 유훈이 당규에 묻어있는데, 그 유훈을 대를 이어 따른다는 것이 당규에 담긴 핵심 메시지다.”
조선노동당 당규엔 ‘조선노동당은 조국 통일발전과 융성번영을 위한 길에 적극 나선다’거나 ‘조선노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 침략을 철거시키고 (중략) 조국 평화통일을 앞당기고, 민족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이 헌법을 개정하게 되면, 당규와 상충하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면서 “그때 우선순위는 당규에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소식통은 “이번에 김여정이 포격도발을 한 뒤 ‘폭약을 터뜨렸는데 너희가 속았다’는 식을 말하지 않았느냐”면서 “당규가 포격이라면 헌법은 폭약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통은 “당규까지 개정된다면 그때는 정말 북한이 통일 노선을 포기하고 한국과 남남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김정은 입장에서 당규를 개정하는 것은 ‘김일성-김정일’ 유훈을 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부담이 있을 수 있는 사안”이라고 했다. 그는 “김정은이 미국 대선, 한국 총선 등 정치 이벤트를 앞두고 ‘대북 협상 필요성’을 국제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일환으로 강경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한 탈북민은 “북한이 가이드라인으로 받드는 ‘주체사상’에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그 혁명에서 핵심 목적 중 하나가 남조선 인민 해방”이라면서 “김정은이 통일을 안 하겠다고 강조한다면, 북한 통치 핵심 가이드라인인 조선노동당 당규뿐 아니라 주체사상과도 상충하는 측면이 있다”고 바라봤다.
그 가운데, 북한이 대남공작을 축소하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현지 소식통 전언에 따르면 통일전선부 산하 조직인 문화교류국에선 ‘몸집 줄이기’ 작업이 한창인 것으로 전해졌다. 문화교류국은 한국 내부에 침투해 비밀지하조직 구축 및 간첩 관리를 하는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교류국은 조선노동당 소속이다가 2009년 내각 소속으로 개편되면서 225국으로 불린 이력이 있다. 그러던 2015년 다시 조선노동당으로 원대복귀하며 이름을 문화교류국으로 바꿨다.
앞서의 대북 소식통은 “공작원들이 쓰는 지하 아지트, 연락소 등 절반이 없어졌다”면서 “아지트를 운용하고 이런 것에 다 돈이 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소식통은 “외지에다 아지트를 만드는 데에도 돈이 들고, 공급하는 물자도 모두 외화로 사야 하는데, 그게 이제 감당이 되지 않다보니, 통일전선부뿐 아니라 일반 대남공작 부서도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고 있는 양상”이라면서 “현금 자체가 고갈돼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