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파 ‘병립형’ 명분파 ‘준연동형’ 갈려…국민의힘 ‘권역별 비례제’ 협의 의향 속 민주당 지도부 선택 주목
2023년 11월 2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한 말이다. 이 대표는 “총선에서 1당을 놓치거나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부·여당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며 “정상적인 정치가 작동한다면 국민 정서를 고려해 적절하게 타협했을 것이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이 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로 마음을 굳혔다는 분석이 나왔다.
#실리냐 명분이냐
이 대표 발언이 나온 후 민주당에선 선거제 개편을 두고 샅바 싸움이 벌어졌다. 민주당은 2023년 11월 30일 의원총회를 열고 선거제 개혁 관련한 난상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선거는 이기고 봐야 한다는 실리파에선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를 주장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를 주장하는 명분파는 병립형 회귀에 대해 선거제 퇴행이라고 맞섰다. 지역구도 타파라는 명분을 앞세워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중재안도 나왔다.
의총이 끝난 직후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의원들 입장을 보면 반반이었다. 연동형 비례제 이야기하신 분도 계셨고 ‘권역별 비례제라면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병립형으로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의견도 있었다”고 전했다.
민주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민주당 내부에서 언급되는 선거제도는 △병립형 비례대표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 등이다.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을 별도의 투표로 선출하는 제도다. 지역구 253석과 비례대표 47석을 따로 뽑는 셈이다.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자에 1표, 비례 의원을 뽑기 위한 정당별 투표에 1표를 행사한다. 투표 체계가 단순해 유권자들이 쉽게 선거제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거대 양당이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대부분 차지하는 현상이 발생해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이 힘들고, 민의가 왜곡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20대 총선까지는 병립형으로 치러졌다.
병립형 비례대표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21대 총선을 앞두고 도입됐다. 현실적으로 지역구 당선자를 내기 어려운 소수정당이 당선자를 낼 수 있도록 다양성을 보장하자는 것이 제도의 취지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따르면 지역구 의석수 비율이 정당 득표율보다 적으면 모자란 의석의 100%를 비례대표 의석으로 채워준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약 50%의 의석만 채워준다.
그러나 비례대표 선출방법이 복잡해 유권자들이 혼란을 겪었다. 법을 만든 국회의원도 이해하지 못하는 선거제도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비례대표 의석만을 노린 위성정당 꼼수 논란도 일었다. 국민의힘은 처음부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반대해 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위성정당을 창당했다. 그러자 민주당도 약속을 어기고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그 결과 제도의 취지와 달리 민주당과 국민의힘으로 의석수가 편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국민의힘은 오는 22대 총선에서도 위성정당을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성정당 이름은 ‘국민의미래’다. 국민의힘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위성정당을 창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미래는 정당법에 따라 전국 5개 이상 시·도당 창당대회를 연 다음 중앙당 창당대회를 거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할 계획이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국민의힘의 전신)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은 비례대표 의석 47석 가운데 19석을 얻었다.
정치권에서는 국민의힘의 위성정당 창당 움직임이 민주당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반응이 많다.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으면 민주당은 비례 의석에서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다시 위성정당을 만들면 자신들이 통과시켰던 법을 무력화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진보 계열 소수정당과 연대해 진보 연합정당을 구성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제시됐지만, 이 또한 위성정당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연동형이 아닌 병립형을 하게 되면 어떤 선택을 해도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진퇴양난인 답답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찬성하는 민주당 의원들은 지도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월 26일 이탄희 의원 등 민주당 의원 81명은 기자회견을 열고 “병립형 퇴행은 윤석열 심판 민심을 분열시키는 악수 중의 악수”라며 “비례 몇 석 더 얻으려다 253개 지역구에서 손해 보는 소탐대실을 막아야 한다. 지역구 민주당, 비례 연합으로 연동형 대국민 약속을 지키는 민주개혁진보연대를 이뤄야 한다”고 밝혔다. 절반에 가까운 의원들이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실리파 의원들도 행동에 나섰다. 친명계 정청래 최고위원은 1월 28일 민주당 의원 단체 텔레그램 대화방에 ‘권역별 (병립형) 비례제’ 도입을 위한 전 당원 투표를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정 최고위원은 "민주당 당원과 지지자들을 무시하고 비당원과 비지지자들로 선거를 치르자는 것이냐"며 “민주당 선거 승리의 99%가 당원과 민주당 지지자(에 달려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면서 "이분들의 뜻을 거스르고 어떻게 선거를 치르냐"며 "(당원들의) 뜻을 먼저 살피자는 차원에서 전 당원 투표를 제안한다"고 말했다. 이에 진성준 의원을 비롯한 일부 의원들이 ‘이제는 지도부가 결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실리파는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나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지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전국을 몇 개의 권역으로 나눠 권역별 정당지지율에 따라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당선자는 각 정당이 사전에 제출한 권역별 비례대표 명부 순위에 따라 결정된다. 지역주의 완화가 이 제도의 장점으로 꼽힌다. 호남과 영남이 한 권역으로 묶이면 보수 텃밭인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호남 출신 의원이 나올 수 있다.
다만 이 제도도 거대 정당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를 들어 전국을 수도권과 중부, 남부(영·호남) 등 3개 권역 나누면 한 권역당 약 15석의 비례 의석(전체 45석)이 배분된다. 단순 계산으로 득표율 7%를 넘은 정당만이 권역별 비례대표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현재 지지율이 7%가 넘는 당은 거대 양당을 제외하곤, 이준석 대표의 개혁신당뿐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는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 역시 거대 양당을 위한 선거제도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참여연대는 1월 3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번에 반칙을 저질렀지만, 퇴장을 당하지 않았다고 다시 반칙을 쓰겠다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축제인 선거에서 또다시 유권자를 기만하겠다는 결정”이라며 “국민의힘은 위성정당 재창당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에 대해서는 “이미 당내 절반에 육박하는 80여 명의 의원들이 병립형 비례제로의 회귀를 반대하고 있고, 소수정당 및 학계와 노동시민사회 또한 국회의 다원성 제고를 위해 위성정당 방지법의 조속한 처리와 연동형 비례제 유지를 촉구하고 있다”며 “민주당 지도부가 국민의힘과 선거제 퇴행에 야합하여 권역별 병립형 비례제를 당론으로 채택한다면 이는 정치개혁에 대한 배신이자 역사의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민주당은 국민과 한 약속대로 위성정당 방지법을 처리하고, 준연동형 비례제 유지를 결단하라”고 촉구했다.
친명계로 분류되는 한 전략통은 “(위성정당으로) 준연동형 비례제의 취지가 다 몰각됐다”며 “연합비례정당을 만들어도 위성정당 꼼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또 말이 쉽지 누구를 (연합신당) 대표로 할 것인가. 비례대표 순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복잡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래서 연동형 비례대표 취지를 못 살릴 거라면 지역주의 타파라는 목적이라도 달성하자. 그러한 취지에서 (권역별 비례대표제) 주장이 나왔다”며 “동의하는 의원들이 꽤 많다”고 주장했다.
소수정당이 불리하다는 지적에는 “이준석 신당 같은 경우도 지역구에 후보를 내겠다고 하고 있다. (이준석 본인은) 비례 정당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물론 준연동형 아래에서 신생 정당들이 의석을 더 확보할 가능성이 높지만, 병립형이라고 해서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 (권역별) 병립형일 때는 7% 봉쇄 조항이 있었는데, 그것을 좀 낮춰주겠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선거제 키 쥔 이재명
임혁백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은 중재안으로 ‘소수정당 배분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제안했다. 이는 각 권역 비례 의석의 30%를 정당 득표율 3% 이상을 얻은 소수정당에 먼저 배분하는 방식이다. 제도가 도입되면 소수정당은 최소 15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 박병영 대변인은 1월 29일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열린 4차 회의가 끝난 다음 기자들과 만나 “임혁백 공관위원장이 ‘여야 협상이 가능하고 지역균형 안배가 가능한 소수정당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국회에서 속히 타결되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 밖에도 민주당은 ‘이중 후보 등록제’ 도입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후보 등록제는 지역구 후보자 가운데 일부를 비례대표 후보로 입후보시키는 제도다. 그러나 지역구에서 떨어진 후보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비례성 강화로 볼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의힘은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두고 협상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1월 19일 이양수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는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협의에 임할 경우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도 협의할 의향이 있다”며 “우리 국민의힘은 정당의 정책과 비전을 바탕으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병립형 비례대표제의 복원을 일관되게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국민의힘은 소수정당 배분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이중 후보 등록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 여론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소속 한 보좌관은 “지금 반반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권역별 병립형을 지지하는 의원이) 3분의 2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며 “정말 어떤 신념으로 정치적 이익이든 상관없이 (준연동형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체 의원의) 3분의 1 정도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은 “이번 주(1월 말 2월 초)에 이재명 대표 신년 기자회견도 있고, 의총을 열어서 논의를 집중적으로 하게 될 것 같다. 이번 주가 중요한 논의의 고비가 될 것 같다”며 “(최종 결정은 늦어도) 설날 전후가 될 것 같다”고 전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전 당원 투표를 한 후에 선거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결국 선거제를 풀 열쇠는 이재명 대표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다. 이 대표는 20대 대선에서 “비례대표제를 왜곡하는 위성정당을 반드시 금지하겠다. 피해를 본 정당들에 다시 한번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위성정당이 없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약속했다. 이번에 병립형으로 돌아가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 약속을 뒤집는 모양새가 된다. 이 대표가 약속과 실리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민주당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병립형으로 가든 연동형으로 가든 다 우여곡절이 있다. (이 대표가) ‘현행 제도를 유지하면서 당이 중심을 잡으면서 가자’ 이럴 가능성도 꽤 높다. (선거제에 대해서는) 최고위원들은 논의를 충분히 했다. 대표가 좀 더 의견을 수렴해서 결정을 내리면 따르는 것으로 돼 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