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 그룹 ‘법안 전쟁’ 삼성 연합군 히쭉
▲ 현대차 본사 건물과(오른쪽), 정몽구 회장. 노조 전임자의 임금 명목으로 매년 수십억 원을 쓰는 현대차로서는 이번 결정이 결코 달갑지 않다. | ||
지난 9월 11일 노사정 대표자회의는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에 대한 협상을 극적으로 타결했다.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을 3년간 유예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러나 이 합의는 민주노총이 빠진 상태에서 한국노총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주도 하에 이뤄진 것으로 향후 민주노총의 거센 반발이 불가피해 보인다. 민주노총은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를 위한 10월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 결과에 반대하는 세력이 노동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을 기대해온 현대차그룹 또한 이번 합의결과에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다.
삼성과 현대차 양측 모두 이번 노사관계 로드맵 협상을 두고 전방위 로비전을 펼쳤지만 결국 힘의 추가 삼성으로 기운 채 마무리됐다. 삼성은 물론 그 방계 기업들이 총출동한 덕분에 ‘홀로 싸운’ 현대차가 무릎을 꿇고 만 셈이라는게 재계의 평이다.
지난 9월 6일 과천청사 노동부 기자실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가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유예’로 결론날 것이란 소식을 접한 현대차 인사가 기자실을 찾아가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언론인 출신이기도 한 현대차 인사는 이 날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노사관계 로드맵 쟁점 사안이 유예된 것에 대한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에 대해 3년 유예 합의를 이끌어낸 것에 현대차가 불만을 표현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진 현대차 노조 전임자는 90명 정도다. 이들의 평균연봉을 5000만 원으로 환산하면 현대차는 ‘노조 활동만 하는 직원들’을 위해 매년 45억 원을 써야 한다. 비공식 노조 전임자와 기타 비용을 위해서도 매년 수십 억 원이 투입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만약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이 법적으로 금지되면 엄청난 금전적 수혜를 보게 되는 셈이다.
▲ 삼성본관 건물과(오른쪽), 이건희 회장. 이번 노사정 로드맵 결정은 삼성이 청와대 시민단체 여성단체 등을 상대로 벌인 전방위적인 로비의 결과라는 시선이다. | ||
반면 삼성 측은 표정관리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의 최대고민은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던 ‘복수노조 허용’이었다. 삼성은 지금껏 노동자 주체 노조 설립 움직임이 감지될 때마다 사측 인사가 해당 관청에 먼저 찾아가 미리 노조 설립 신고를 하는 식으로 대처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있으나마나 한 유령노조를 만들어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노조에 대한 관청의 허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온 것이다. 올해 들어 삼성은 복수노조 시대를 대비해 노조 설립 움직임을 보이는 인사들을 요주의 대상으로 분류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동시에 회사 차원의 공식 행사를 주로 토요일에 치러온 관행을 없애는 등 각종 복지혜택을 베풀어 노동자들의 마음 얻기에 나서왔다. 대표적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경우 내년 초 사측이 노동자 대표들과 함께 ‘노사 화합 선언’을 발표하기 위한 계획까지 수립해놓은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삼성은 이번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복수노조 금지조항 철폐가 이뤄지지 않게 하려는 로비전 또한 치열하게 벌여온 것으로 알려진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바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가입이다. 무노조 경영을 표방해온 삼성의 주요 계열사들이 최근 들어 ‘노사 관련 업무를 다루는’ 경총에 가입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는 복수노조 시대에 대비한 포석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그러나 복수노조 허용 유예 결정 이후 재계 인사들 사이에서 ‘삼성이 경총을 장악해 삼성에 유리한 여론을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게 됐다.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불참한 채 지난 9월 11일 복수노조 허용 유예 결정을 지켜봐야했던 민주노총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노총은 “정부는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를 오가며 뒷거래를 하면서 야합을 주도했다”고 비난했다. 정치권과 재계 노동계 인사들은 민주노총이 지목한 ‘사용자 단체’가 ‘삼성’을 지칭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삼성의 전략기획실(옛 구조본) 정보 담당 부서와 주요 계열사 대외협력팀 그리고 삼성경제연구소에 소속된 인사들이 총동원돼 복수노조 금지 정당화를 위한 논리를 개발하고 이를 각계에 전파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과 시민단체 여성단체 등에 인맥을 풀어 ‘삼성의 논리’를 설파해온 셈이다. 여러 유관단체들에 대한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을 사는 것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노조 문제에 대해 삼성과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현대차 또한 정치권과 여러 시민단체 등에 전방위적 로비를 펼쳐왔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이를 두고 삼성과 현대차가 ‘1 대 1’ 승부가 아닌 ‘삼성 연합군 대 현대차’ 구도로 맞붙어 현대차가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여러 재계 인사들은 “범 삼성가인 CJ 신세계 한솔 등이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유예를 위한 논리 전파에 각각 앞장서온 것으로 안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 범 삼성가 재벌들 또한 노조를 보는 시각과 복수노조에 대한 이해관계 측면에서 삼성과 다를 바 없는 까닭에서다.
CJ 신세계 등은 검찰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수사 관련 참고인 조사, 그리고 거액의 상속세 헌납 선언 등으로 삼성과 다소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노조 문제’라는 거대 논제 앞에서만큼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실천해 보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이번 노사관계 로드맵 정립을 통해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이란 굴레를 벗어던지고자 했던 현대차는 넋이 나간 표정이 역력해 보인다. 일각에선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인단체와 아예 담을 쌓고 지낼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