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기소 3년 5개월 만에 1심 무죄 판결…멈춘 조 단위 M&A 실행, 지배구조 개편 속도 전망
#19개 혐의 모두 무죄
지난 2월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서관 출입문 앞은 취재진들이 설치한 카메라 장비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날 오후 2시 이재용 회장이 2020년 9월 1일 검찰에 기소된 지 약 3년 5개월 만의 선고 공판이 예정돼 있었다. 오후 1시쯤부터 취재진과 일반 방청객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법원은 재판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별도 법정도 따로 마련했다.
이재용 회장은 경영권을 승계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 주도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추진하며 각종 불법 행위를 저지른 혐의를 받았다. 이 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자본시장법을 위반한 혐의와 이 과정에서 벌인 업무상 배임, 외부감사법상 거짓공시·분식회계에 관여한 혐의 등 총 19개 혐의를 받았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이사회를 거쳐 제일모직 주식 1주에 삼성물산 약 3주 비율로 합병을 결의했다. 합병 당시 이재용 회장은 제일모직 주식 23.2%를 갖고 있었지만 삼성물산 지분은 없었다. 검찰은 삼성그룹이 ‘프로젝트-G(Governance·지배구조) 승계계획안’을 짜고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유리한 방향으로 합병 작업을 실행했다고 봤다. 검찰은 지난해 11월 결심공판에서 이 회장에게 징역 5년과 벌금 5억 원을 구형했다.
이재용 회장은 선고 공판 20분 전인 오후 1시 40분쯤 재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법 청사에 도착했다. 눈과 비가 뒤섞여 내렸지만 이 회장은 우산을 쓰지 않고 법정을 향했다. 별다른 입장 표명은 없었다. 2시가 조금 넘어 재판부는 선고 공판이 열리는 417호 대법정에 들어섰다. 박정제 부장판사는 “오늘 판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고 말한 뒤 판결 취지를 읽어 내려갔다.
재판부는 합병이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이었다는 검찰의 핵심 공소사실부터 부정했다. 재판부는 “이 회장과 미전실이 합병을 전단적(혼자 마음대로 결정하고 단행)으로 추진하지 않았고, 경영권 승계만이 합병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볼 수 없다”며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수반됐더라도 합병에 합리적인 사업적 목적이 있었다”고 했다. 프로젝트-G 문건에 대해서도 “내부 지배구조 개선방안에 대한 검토 종합 보고서”라며 “검사의 주장처럼 약탈적 불법 합병계획을 담은 승계 계획안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배임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은 합병 과정에서 삼성물산 가치를 축소해 삼성물산 투자자들이 재산상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검사가 주장하는 손해는 추상적 가능성에 불과해 그 자체로 업무상 배임죄의 손해가 될 수 없다”며 “두 회사 합병을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와 경영권 안정화는 오히려 삼성물산과 그 주주들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재용 회장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거짓공시·분식회계에 관여한 혐의도 인정되지 않았다. 검찰은 합병 전후 제일모직 주가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 가치가 고의로 부풀려졌다고 봤다. 다만 재판부는 “회계 기준 위반이란 점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볼 수 없고 피고인들의 고의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박정제 부장판사가 판결 취지를 설명하는 내내 “증거 능력이 없다” “단정할 수 없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발언이 이어졌다. 판결문을 낭독한 지 50분쯤 지났을 때 박 부장판사는 “이 사건 공소사실은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어서 무죄를 선고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곧이어 박 부장판사는 주문을 낭독했다.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 이재용 회장과 함께 기소된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전실 실장, 김종중 전 미전실 전략팀장,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 등 나머지 피고인 13명도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날 이 회장은 역시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고 법원을 빠져나갔다.
#투자 속도 전망…지배구조 개편 집중할 듯
이번 선고로 이재용 회장의 운신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경영권 불법 승계 관련 재판은 검찰 기소 이후 3년 5개월간 107회 열렸다. 이 회장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재판에 출석했다. 이 회장은 글로벌 빅테크(대형 기술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모이는 ‘선밸리 콘퍼런스’에도 2016년 이후 참석하지 못했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의 미래 청사진을 담은 ‘뉴삼성’을 제시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로 유명한 이건희 선대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맞먹는 이재용 회장의 대외적인 메시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삼성전자는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매출 1위 자리를 2년 만에 미국 인텔에 내줬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스마트폰 판매 1위 자리도 12년 만에 미국 애플에 뺏겼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AI(인공지능) 반도체로 흘러가는데 삼성전자의 역량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의사결정 주체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나 M&A를 쉽사리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이제는 과감한 의사결정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삼성전자의 조 원 단위 M&A는 2017년 하만을 9조 원에 인수한 것을 마지막으로 멈췄다. 지난해 말 미래 사업 동력 발굴을 목적으로 설립된 미래사업기획단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재계에서는 삼성그룹의 경영 전반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은 2017년 2월 미전실이 공식 해체된 후 사실상 자율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사업지원(삼성전자) △금융 경쟁력 제고(삼성생명) △EPC(설계·조달·시공) 경쟁력 강화(삼성물산) 등 3개의 태스크포스(TF)가 계열사를 관리한다. 하지만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룹을 아우르는 새로운 컨트롤타워가 구축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용진 교수는 “이 회장이 등기이사에 오른다면 이 회장 주축으로 협의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황용식 교수는 “전문경영인이 포진한 공동 의사결정기구가 설립될 수도 있을 듯하다”고 내다봤다.
이재용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 역시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 회장은 2016년 10월 처음 삼성전자 등기이사에 올랐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렸다. 이 회장의 등기이사 임기는 2019년 10월 만료됐다. 이 회장은 2022년 10월 삼성전자 회장으로 승진했지만 등기이사로 복귀하지 않았다. 현재 4대그룹 총수 중 유일하게 미등기 임원이다.
다만 검찰은 항소할 가능성이 높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검사가 항소하지 않으면 무리하게 기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라 대법원까지 가서 다툴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 적어도 2심 결과를 보고 등기이사 복귀 시점을 결정하지 않을까 싶다”라고 밝혔다.
김명선 기자 se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