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표 대장동·백현동 재판 등 지연 불가피…재판연구관 출신 중용, 임기 늘리는 방안도 검토
법원 안에서 오랜 동안 통용됐던 암묵적인 룰이다. 물론 많은 것이 변했지만 인사 전 ‘끝내고 갈 사건, 남기고 갈 사건’을 구분하는 것은 여전하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영권 승계 관련 사건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법원행정권 남용 사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비리 의혹 사건 선고 등이 모두 인사 전인 2월 중에 이뤄졌다.
하지만 장기화되는 재판을 놓고는 논란이 상당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우 기소된 지 3년 5개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경우 4년 11개월, 임종헌 전 차장의 경우 5년 2개월 만에 1심 판단이 나왔다. 1월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심리하던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의 강규태 부장판사가 법원 인사를 앞두고 사표를 제출하면서 재판장 사직 또는 재판부 교체에 따른 재판 장기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재명 대표 사건 모두 재판부 변동
2월 중 이뤄지는 법원 인사를 앞두고 여러 사건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건들이 대표적이다. 대장동·백현동 특혜개발 의혹 재판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 김동현)는 한 달 동안 재판이 연기된다. 법원 정기 인사에 따라 김동현 부장판사를 제외한 2명의 배석 판사들이 모두 교체됨에 따라 공판갱신 절차를 진행키로 했다.
재판부는 2월 6일 이 대표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 공판준비기일을 열고 “다음달 26일까지 끝내는 것을 목표로 최대한 간단히 공판갱신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공판갱신은 변경된 재판부가 사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그간 진행된 공판을 다시 진행하는 절차를 말한다.
당연히 이에 응하는 원고(검찰)와 피고(이재명 대표 측)의 대응 전략은 다르다. 이 대표와 함께 재판에 넘겨진 정진상 전 민주당 당대표 정무조정실장 측은 “현장감을 위해 녹음파일을 듣는 게 효과적이라 판단한다. 녹음파일 청취 방식으로 갱신 절차를 진행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검찰은 “최대한 간이절차로 진행했으면 좋겠다. 속기록과 증인신문 내용이 사실상 동일하고 현장에서 갱신절차에서 다시 들으면 1.5배속이라 현장감이 떨어지고 무용한 절차가 반복되는 것”이라고 맞섰다. 최소 한 달 이상, 최대 세 달가량 재판 지연이 불가피한 대목이다.
대장동 본류 사건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이준철)도 배석판사가 한 명 교체된다. 이준철 부장판사는 계속해서 관련 사건의 심리를 이어가지만, 이 역시 조희대 대법원장의 법관 사무분담 연장 기조에 따라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준철 부장판사는 서울중앙지법에서 근무 햇수가 2년이 넘어 당초 이번 인사 대상에 포함될 예정이었다.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의혹 등 사건을 심리했던 형사합의34부는 배석판사들이 교체되지 않지만, 재판장인 강규태 부장판사가 사의를 표하면서 논란이 됐다. 고의적으로 사의를 표명하기 전 결론을 내지 않기 위한 ‘재판 지연’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 선거법 관련 사건 1심은 6개월 안에 끝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 대표 재판은 이미 1년 5개월가량이나 진행된 상황이라 논란이 됐다. 이에 강 부장판사는 주변에 “내가 조선시대 사또도 아니고 증인이 50명 이상인 사건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라고 억울함을 표했다고 한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아무도 고의적으로 재판 지연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도 “원래 2월 인사를 앞두고 7~8월부터는 하나씩 ‘끝낼 사건과 끝내지 못할 사건’을 배석판사들과 함께 정리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재명 대표 사건은 남기는 사건이 됐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실제로 강 부장판사는 사직하지 않았더라도 법관 정기 인사 대상이었기에 이 대표 관련 재판은 지연이 불가피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에서 진행 중인 200억 원대 횡령·배임 및 계열사 부당 지원 의혹으로 기소된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회장 사건도 재판 지연이 불가피하다. 재판장 조병구 부장판사가 수원지법 수석부장판사로 자리를 옮긴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의 핵심 인물인 김만배 씨로부터 아들을 통해 50억 원을 수수한 의혹을 받는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과 아들 병채 씨의 추가기소 건도 형사합의23부에서 진행 중이었던 터라 2주일 이상의 지연이 예상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배석 판사가 한 명 새로 오게 됐을 때 진행 중인 사건을 모두 파악하려면 두 달가량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재판부 임기 손보는 방안 검토 중
대법원은 재판 지연을 해결하기 위해 재판부 임기를 손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재판장 2년, 배석판사 1년에서 각각 3년과 2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중요 사건은 아예 한 재판부가 전담해 신속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가급적이면 다른 사건을 배당하지 않고 신속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집중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려도 적지 않다. 한 재판부에게 임기와 상관없이 특정 사건을 맡기면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윤종섭 부장판사는 2016년부터 6년 동안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사법농단’ 사건을 3년 동안 맡았고, 김미리 부장판사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 입시 비리 의혹,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을 3년 넘게 맡으면서 논란이 됐다. 피고들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하는 일도 있었다.
#과거 엘리트 코스의 부활?
조희대 대법원장이 과거 ‘엘리트 판사’들의 인사 루트를 다시 부활시키는 방식으로 동기 부여를 이끌어내 재판 지연을 해결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특히 2월 5일자로 대법원 재판을 총괄하는 수석재판연구관에 오민석 법관(사법연수원 26기)을, 선임재판연구관에는 고홍석 법관(사법연수원 28기)을 임명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설명이 나온다. 수석재판연구관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사건 전담으로, 재판연구관으로부터 전달받은 사건에 자신의 의견을 더해 주심 대법관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런 자리에 ‘인정받았던 에이스’들을 앉혔다는 것은 과거 엘리트 코스였던 재판연구관 자리를 다시 활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실제로 수석부장판사 인사에서 전국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 김상훈 민사1수석부장판사(28기) △차영민 형사수석부장판사(28기) △서울서부지법의 전보성 수석부장판사(29기) △수원지법의 조병구 수석부장판사(28기)가 부장판사급 재판연구관 출신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고등부장판사 승진 제도가 없어졌지만 나름대로 ‘일 잘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시그널이 읽히는 인사 같다”며 “다만 이것만으로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환한 객원기자